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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에서 장사를 하는 남편이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들어온 건 지난 주 수요일이었습니다. 평소 소화기능이 약한 남편이었기에, 살로도 안 간다는 객지밥 때문에 드디어 탈까지 났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배가 아파서 집으로 가고 있다는 남편의 전화를 받고는 아껴두었던 전복 몇 마리를 꺼내어 죽을 쑬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남편의 얼굴은 전복죽 한 그릇으로는 감히 달랠 수도 없을 만큼 핼쑥하고 수척해진 데다 힘들어 보였습니다. 남편은 지난 이틀 동안 물 몇 모금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남편의 복통은 내가 바라던 꾀병이나, 객지병이 아님을 증명하듯 남편은 그 좋아하던 전복죽을 보고도 도리질을 칩니다.
그래도 가스불 앞에서 삼십 분을 넘게 서서 죽을 쑨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한 수저라도 떠먹어주지 싶은 것이 철없는 마누라의 마음이라서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남편은 줄줄 흐르는 식은땀을 대충 훔쳐 닦고는 동네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남편은 맹장염이 의심된다는 소견서를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단순한 식체이거나, 소화불량이기를 바랐던 내 예상을 깨는 진단에 남편의 아픔보다 통장잔고가 먼저 내 머리 속을 메웠습니다.
'병원비는 얼마나 나올는지…. 수술하고 나면 당장 다음달 생활비는 어디서 충당을 해야 할지….'
나는 세면도구며 물병 등 입원에 필요한 몇 가지를 챙겨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구부정한 자세로 힘겹게 계단을 내려가는 남편의 뒷모습에 한숨이 절로 푹푹 토해져 나왔습니다.
병원에서는 예상대로 맹장염이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입원서와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나서 병실에서 링거 주사바늘을 꽂고 있는 남편에게 갔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수술을 하는 남편에게 위로라도 해주려고 옆에서 앉았습니다.
그런데 위로한답시고 툭 터져 나온 말이 고작 "며칠 쉰다고 굶어 죽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마!"였습니다. 내게 누가 뭐라고 했나요? 이런 것을 위로랍시고 던진 내 자신이 참 한심해 보였습니다. 내 위로(?)에 남편의 얼굴은 한층 더 일그러졌습니다.
"그러게 걱정이다. 하루 스물 네 시간을 뛰어도 될까말까 하는데, 그냥 쉬는 것도 아니고 돈을 쓰면서 쉬게 생겼으니…."
아빠와 엄마가 무슨 걱정하거나 말거나 병원 응급실을 제 집처럼 뛰어다니며 배고프다고 아우성인 아이들을 뒤로 한 채 남편은 채 떨어지지 않는 한숨을 가슴께 어드메쯤 단 채로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수술실 앞, 진료시간이 끝난 병원 복도는 초여름 해질녘의 따스한 공기와는 달리 복잡한 내 심정만큼이나 을씨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할 때 들었던 온갖 험한 내 예상을 뒤엎고 남편의 맹장수술은 다행히 잘 되었습니다. 하지만 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옮겨진 남편의 고통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수술동의서를 쓸 때 "아주 가난한 사람 외에는 웬만하면 다 맞는 겁니다"라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설명하던 의사의 권유를 뿌리치고, 저는 "무통주사는 맞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기 때문입니다.
나 역시 십년 전 무통주사 없이 맹장수술을 해봤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두 아이를 낳으면서도 무통주사 없이 낳아봤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배를 움켜쥐고 있는 남편에게 한 마디 상의 없이 무통주사를 거부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의료보험처리가 안 된다'는 십수 만원의 주사값 때문이었습니다.
남편보다 늦게 수술을 한 다른 환자들이 '히히' 거리며 TV를 볼 때, 남편은 끙끙대며 고통을 참아야 했습니다. 다른 환자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화장실을 들락거릴 때 남편은 링거대에 의지해 화장실을 겨우 넘나들어야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솔직히 미안했습니다.
"감기보다 우스운 게 맹장이잖아!"라며 가족 중 그 누구도 문병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 아픔을 경험해본 저만은 남편의 아픔을 나눠줬어야 했는데,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사는 십수 만원 때문에 사람을 이리 고생을 시키나 싶어 지지리 궁상을 떠는 제 자신에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나도 무통주사 맞았나?"고 힘겹게 물어오는 남편에게 "아니"라고 대답을 하는 그 순간은 아이들에게 사준 요구르트 한 병이, 내 입에 들어 있는 사탕 한 알이 감당할 수 없는 멍에가 되어 가슴을 짓눌렀습니다. 그래도 "왜?"냐고 묻지 않은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퇴원을 하는 그 순간까지도 옆 사람들의 편안함에 굳이 눈을 두지 않았고, 병실이 넘치도록 찾아오는 문병객들과 시시덕거리며 농담을 주고받는, 누가 환자이고 누가 문병객인지 구분이 안 가는 다른 환자들의 쾌활함을 부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제 막 실밥을 푼 남편은 다시 차를 몰아 객지로 떠났습니다. 세상물정을 몰라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뭔지도 모른 채 사인을 해버린 이 마누라 때문에 예상보다 훨씬 많이 나온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지난밤에는 남편과 함께 새벽 1시까지 동대문을 돌아다니며 내다 팔 옷을 샀습니다. 저는 놀러 가는 줄 알고 따라나섰다가 차 안에서 잠이 든 두 아이를 지키느라, 싸고 좋은 물건을 찾기 위해 시장 안을 이 잡듯 뒤질 남편의 그 걸음을 한 번 덜어주지 못했습니다. 또 휘청거리며 들고 오는 옷 봉지 한 번 받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남편이 불편하다고 풀러놓고 간 낡은 벨트가 더 눈에 밟히는지도 모릅니다. 집에 와서 아직도 수술 자국이 선명한 배 위에 비닐 랩을 씌우고 남편의 등을 밀어주면서 처음으로 젊지도 늙지도 않은 이 남자가 참 가엽게 느껴졌습니다.
점심때가 훌쩍 지나서 남편은 OO에 잘 도착을 했다고 전화를 해왔습니다. 남편에게 "밥 잘 챙겨먹고, 당분간은 조심해요!"라고 말을 하는데 갑자기 목이 메어왔습니다.
하루만이라도 남편을 더 쉬게 하지 못하고, 쉬고 있을 때 몸에 좋은 거 한 그릇 못 해줘놓고, 이제와 웬 생색인가 싶었습니다. 미련하고 못난 내 자신이 미웠습니다.
남들에겐 비록 감기보다 못한 맹장이었지만, 저에게 있어 '남편의 맹장수술'은 남편의 존재와 소중함, 저의 못남을 자각하는 훌륭한 고통과 감동의 배움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