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리 예술마을은 파주 통일전망대에서도 더 들어간 깊은 곳 벌판에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언제 꼭 한 번 가봐야지 하면서도 미뤄두었던 이 곳 나들이를 한가해진 요즘에야 가게 되었습니다.
지하철 3호선 종착역인 대화역에서 탄 버스는 30분쯤 가다가 벌판에 나를 떨구어놓고 가버렸습니다. 공원 출입구 같은 곳이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다리 건너편에 ‘신식’ 집들이 많은, 그야말로 마을 입구였습니다.
‘게이트 1’이라는 이정표가 있는 걸 보니 출입구가 여러 곳인 모양입니다. 한여름처럼 땡볕이 쬐는 날이었습니다. 그저 길 따라 걸었습니다. 집들이 아니, 건축물들이 띄엄띄엄 놓여져 있습니다. 같은 모양의 집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개성 강한 모양새와 품위 있게 지어져 있었습니다.
가지고 온 잠바를 햇볕을 막아주는 모자 대용으로 사용했습니다. 손에 수시로 카메라를 쥐었습니다. ‘작업’을 하기 위해서요. 예쁜 곳, 웅장한 곳, 낯선 곳, 감흥을 자아내는 곳, 신기한 곳 등등 <창이 있는 풍경>을 위해 ‘창이 있는 풍경’을 찾아 카메라를 들이댔습니다.
커다란 곰 인형 둘이 기대고 있는 창, 그 안에 있는 많은 인형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매거진 하우스’라는 집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잡지를 위한 공간과 카페 공간이 같이 있는 곳입니다.
왼쪽 곰 인형은 더운 날씨에도 머플러를 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계절 감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오른쪽 곰 인형은 멜빵바지를 입고 있습니다. 볼 때마다 입고 싶어지는 옷 중의 하나가 멜빵바지인데 아직도 입어본 적이 없습니다. 문득 손쉽게 할 수 있는데 하지 못하는 것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런 걸 발견하면 적어두었다가 하나씩 해보기로 합니다. 올 여름에는 멜빵바지를 꼭 입어봐야겠습니다.
두 번째로 ‘UNA' 카페라는 곳을 보았습니다. 창가에 다기 잔들이 칸칸이 놓여 있습니다. 도예가가 이 카페 주인이라고 합니다. 창가의 것들은 주인이 만든 작품이겠지요. 자전거를 타고 온 한 부부가 자전거를 세우고 이 카페를 둘러봅니다. 자전거 하이킹 복장도 갖춰 입고 있습니다.
이 부부가 사진 찍는 걸 방해합니다(?). 지금 생각하니 부럽기도 합니다. 정말 헤이리 마을은 자전거로 산책하기 딱 좋은 곳입니다. 그만큼 넓기도 하고 차가 많지 않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이 외딴 곳까지 자전거를 끌고 오는(?) 것이 문제이긴 합니다만.
마을 곳곳에 새로 건축물을 짓는 곳이 여러 곳 있었습니다. 그래서 헤이리 마을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한 10년은 지나야 고즈넉함을 건축물 안팎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규원(葵園) 해바라기집’이라고 이름 붙여진 집을 봅니다. 설마 했는데 자전을 열어보니 ‘葵’자가 ‘해바라기 규’자입니다. 와! 그런 한자가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창가에 놓인 소파와 탁자가 눈길을 끕니다. ‘둘이서만’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입니다. 한밤에 글라스 안 촛불을 켜고 전면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보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주말에만 문을 연답니다.
이 건물은 건축가 승효상씨가 지었습니다. 건물 외벽을 인위적으로 벌겋게 녹슬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것을 대학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분이 지은 ‘쇳대박물관’입니다. 제 생각에 이렇게 ‘녹슴’을 내버려두는 것과 같은 이미지로 ‘노출 콘크리트 기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으나 이 곳 헤이리에서는 콘크리트 외벽에 도색 등의 아무런 마감을 하지 않은 건물이 간간이 눈에 띕니다. 예술이든 건축이든 원숙해지면 덧입히거나 채우거나 하는 것에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내버려두거나 비워 내거나 하고 싶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갤러리 ‘MOA’에 들어가 작품을 보았습니다. 제가 첫 손님이라면서 친절하게 전시실 불을 켰습니다. 'Hey Art Hello Design'이라는 멋진 타이틀로 디자이너와 설치작가들이 작품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작품들 중에서도 눈 밝은 나는 창을 발견하고 맙니다! 안에 밝아지다 어두워지게 하는 등을 설치한 작은 상자들의 모음 작품입니다. 해가 뜨고 지는 일이 금세 이루어지는 ‘건축물’의 이국적인 창들입니다. 갤러리 주인 허락 받고 작품 사진을 찍었는데 왠지 조금은 싫은 기색이었습니다. 더욱 미안한 것은 자발적으로 입장료 1000원을 넣게 되어 있는데 나중에 넣어야지 하다가 깜빡 한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그 생각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났습니다.
‘책이 있는 집’이라는 집에 닿습니다. 이정표에 집 소개가 적혀 있었습니다. "책장 자체가 구조 역할을 함과 동시에 책장의 연결 흐름으로 집안 곳곳에서 책을 접할 수 있고 공간을 구획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안내말 그대로 2층 창가에는 많은 책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눈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창가에 만들어진 책장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들쑥날쑥한 모양새를 보니 주인이 평생 모은 책 같았습니다. 단순히 장식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책장 자체가 구조 역할을 함'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입니다. 책은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매체입니다. 집의 구조, 벽면이라 할 구조에 책이 자리잡은 것도 그 연결의 이미지를 부각시킵니다.
집안 곳곳에 책장이 있다면 원하는 책을 찾아 이곳저곳을 오가곤 하겠지요. 창가에 자리잡은 책들은 밖의 기후 변화를 눈여겨볼 수 있습니다. 책에도 생리가 있다면 비가 올 때 도드라지는 책도 있을 것이고, 눈이 흩날릴 때 돋보이는 책도 있을 것입니다. 이 집주인은 말할 것도 없겠구요. 주인과 책이 같이 오감을 느끼고 같이 늙어 가는 그런 멋진 집입니다.
대낮의 마을은 무척이나 한적했습니다. 저녁에는 사람들이 오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랍니다. 주말에만 미어 터진 답니다. 나중에 다시 들러 건축물 속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아직 낯선 곳이라 분위기에 푹 젖을 자신은 없습니다만 동행하는 누군가가 있으면 달라지겠지요. 자전거 하이킹 하던 부부를 다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