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인 50년 7월 인민군으로 위장한 일명 '나주부대'가 1000여명의 양민을 학살했다는 의혹이 일부 사실로 확인됐다. 그러나 유족회 등은 당시 나주경찰부대가 인민군으로 위장해 가짜 인민군 대회를 열도록 유도한 뒤 800여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하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경찰청 과거사위)는 22일 나주경찰서 대강당에서 열린 조사 결과 현장발표에서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남과 완도 등 5개 지역에서 약 35명 정도가 나주경찰부대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사료된다"고 잠정 결론냈다.
그동안 광주인권운동센터의 조사와 유족회 등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7월부터 8월사이 나주경찰서 경찰부대(일명 나주부대)가 후퇴하던 중 인민군으로 위장해 해남·완도·진도군 등에서 수백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증언과 주장이 있어 왔다.
나주부대에 35명 희생... 위장은 자구책
애초 증언과 주장보다 양민 학살 규모가 적은 것에 대해 이종수 경찰청 과거위위원장은 "피해지역 주민 등의 주장은 총 14개 지역 856명 이상이지만 유족회에서 조사한 희생자들은 해방 이후 보도연맹사건, 여수사건, 공비소탕사건 등 사망자들이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경찰청 과거사위에 따르면, 50년 7월 26일 전남 해남군 해남읍에서 100여명이 학살됐다는 의혹에 대해 민아무개 등 14명의 양민이 희생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또 해남군 마산면 상등리 주민 20여명이 희생됐다는 증언에 대해서는 김아무개씨 등 15명이 희생됐다고 밝혔다. 이외에 50년 7월 28일 완도군 완도중학교에서 성명 불상의 남자 1명, 완도군 두고지역에서 4명, 소안도에서 김아무개씨 1명이 처형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종수 위원장은 '나주경찰부대의 인민군 위장'과 관련 "해남지역 등으로 이동한 나주 경찰부대 규모는 100여명으로 추정된다"며 "경찰부대가 인민군 복장을 의도적을 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다"고 했다. 이어 "완도읍과 노화도 등 2개지역에서는 나주경찰 스스로 인민군으로 가장했거나 외모로 보아 주민들이 인민군으로 오인하게 된 것"이라며 "인민군과 교전하는 전시상황에서 자구행위로 작전상 위장한 것으로 보이며 경찰직권남용 목적으로 위장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김영세 실무조사관은 양민 학살에 대해 "해남의 경우 의도적인 것이 아니고 잘못된 첩보와 우발적으로 총격을 가해져 억울한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라며 "완도의 경우 주민들이 인민군환영대회라는 것을 인식하고 완도중학교에 모인 것은 사실이지만, 경찰이 태극기를 보여주면서 '우리는 인민군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인민군 만세'를 외쳐서 희생자가 발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한편 의혹이 제기된 양민학살 14지역과 관련 10개 지역은 나주경찰부대의 이동경로와 일치하지만 5개 지역은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았고 완도군 신지도 등 4개 지역은 나주경찰부대가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결론냈다.
나주경찰부대의 양민 학살과 관련 경찰청 과거사위는 "당시 나주부대에 의해 희생된 피해자들에 대해 정부 차원의 상응하는 조치가 없었다"면서 "처형 이유 등에 대한 정확한 조사와 함께 명예회복 등의 조치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족회 "26일에는 인민군도 없었는데 자구책이냐"
오길록 해남유족회 상임고문은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인민군 위장여부에 대해서 자구행위라고 했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틀린 발표"라며 "나주부대는 해남에서 25일과 26일 양민을 무더기로 학살했다"고 말했다.
이어 "자구행위라는 발표가 맞는 말이라면 해남지역에 인민군이 이미 있어야 하는데 인민군이 해남에 나타난 것은 27일"이라며 "그런데 어떻게 자구행위로 인민군으로 위장했다고 할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그는 35명이라는 규모에 대해서도 "해남에서만 100여명이 넘어간다"며 "그리고 농민들이 좌익이니 우익이니 알겠느냐, 인민군이라니까 살기 위해서 '인민군 만세'를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해남유족회 등은 논의 거쳐 이날 경찰청 과거사위 조사 결과에 대해 반박하고 경찰청이 아닌 제3의 기관에서 진상규명을 해달라고 요구할 예정이어서 논란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