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산경'전문
시집 맨 첫머리에 놓여 있는 위 시는 시집 전체를 압축하고 있는 서시(序詩)격에 해당하는 시편이다. 세상에 대한 욕망과 집착으로 망가진 몸을 산속에 부려놓고 얻은 그 삶의 한 경지를 무욕(無慾) 언어로 그려내고 있는 시 '산경'. 이 '산경'의 의미는 '산 속에서 시인이 걸어가는 길(山徑)'이요, '산속의 삶을 언어라는 쟁기로 갈아엎고 있는 것(山耕)'이고 '산속의 큰 깨달음(山經)' 이리라.
기실 '깨달음'이란 무슨 거창한 관념적 실체가 아니라 안달이 나거나 조바심 내는 일을 내려놓는 일이다. 나를 비워내고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의 삶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 한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의 '산방에서 보내는 편지'라는 '시인의 말'은 눈물나게 감동적인 글이다. 이 글에는 세상과 격절(隔絶)된 지난 3년간 산속의 삶과 시와 사물을 대하는 시인의 마음자리가 잘 드러나 있다. 시 '산경'의 어투가 단정형의 종결어미 '-다'로 거듭되고 있지만 시의 서정이 억지나 단정형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길이 없다.
산과 물과 바람이 그러하듯이 자연 속에 하나로 들어앉는 시인의 삶이 그대로 흐르고 있다.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는 맑고 깊은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이른 봄에 내 곁에 와 피는
봄꽃만 축복이 아니다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었다
고통도 아픔도 축복이었다
-(중략)-
육신에 병이 조금 들었다고 어이 불행이라 말하랴
내게 오는 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
죽음도 통곡도 축복으로 바꾸며 오지 않았는가
이 봄 어이 매화꽃만 축복이랴
내게 오는 건 시련도 비명도 다 축복이다
-'축복'부분
'아픔도 통곡도 죽음도 다 축복이다' 라는 마음을 얻기까지 혼자서 걸어간 도종환 시인의 외롭고 무섭고 힘든 길을 생각한다. 정지신호를 보내온 몸을 이끌고 산속에서 나무와 새와 풀과 만나 하나가 되고, 나를 따로 들여다보는 고요한 명상의 시간을 힘겹게 찾아간 그 고투(苦鬪)의 무늬들이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에 다 담겨져 있다.
구름은 비를 뿌리며 빠르게 동쪽으로 몰려가고
숲의 나무들은 비에 젖은 머리를 흔들어 털고 있다
처음 이 산에 들어올 땐
나 혼자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내가 흔들릴 때
같이 흔들리며 안타까워하는 나무들을 보며
혼자 있다는 말 하지 않기로 했다
아침저녁으로 맑은 숨결을 길어올려 끼얹어주고
조릿대 참대소리로 마음 정결하게
빗질해주는 이는 누구일까
숲가 나무가 내 폐의 바깥인 걸 알았다
더러운 내 몸과 탄식을 고스란히 받아주는 걸 보며
숲도 날 제 식구처럼 여기는 걸 알았다
나리꽃 보리수 오리나무와 같이 있는 거지
혼자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숲의 뱃속에 있고
숲이 내 정신의 일부가 되어 들어오고
그렇게 함께 숨쉬며 살아 있는 것이다
-「숲의 식구」전문
시집 해설에서 이문재는 "도종환 시인의 삶과 시는 화엄사상과 생태학이 만나는 또 하나의 꼭짓점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도종환의 시는 지금 바다가 만상(萬象)을 비추는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해인(海印)'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제 몸의 고통과 아픔으로 생명과 축복의 새 길을 열어가는 도종환의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은 올해 우리 한국시단이 일궈낸 귀중한 성과물이다.
우리 시단과 세상이 그를 저잣거리로 자꾸 불러내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그 전에 또 하나의 명편(名篇) '실상사'를 한 번 더 읽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