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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 이듬해 외국에 홍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화보집이다. 52년 세월이 지났지만 다행히 상태가 좋은 책을 구했다.
ⓒ 대한민국 육군
헌 책방에서 오래된 화보집을 하나 구했다.

원래 사진집이나 화보집을 좋아해서 눈에 띄는 대로 일단 들고 오는 편인데, 이번에 구한 화보집은 52년 전 발행된 책인데도 보관 상태가 좋다. 이런 희귀한 책을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책장 구석에서 찾아냈으니 운수좋은 날이라고 해야 할까.

이번에 발굴한 보물은 1954년 대한민국 육군에서 발행한 'REPUBLIC OF KOREA ARMY'라는 책으로 외국에 제공할 목적으로 발행된 영문 화보집이다. 유엔군의 도움으로 전쟁을 치른 뒤라 외국에 홍보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하드커버를 하고 질이 좋은 종이로 만들어, 52년 세월을 보내고도 사진 상태가 좋았다.

모든 내용이 영문으로 되어있는 이 책은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 해에 만들어진 것이라 전쟁 과정에 대한 사진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다. 외국에 보여주기 위한 것인 만큼 전쟁이 남긴 폐허를 딛고 새롭게 건설하려는 의지를 과시하는 사진들이 이어져 있다.

마침 날도 6월 25일이라 오래된 사진 속에 있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들의 모습이 아련하게 다가왔지만 특별히 군인 아저씨들이 공부하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나는 현재 국어능력 인증시험 시행본부에서 일하고 있는데, 처절한 전쟁을 겪은 병사들이 한글을 배우겠다고 열의를 불태우는 사진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고 언제 부산이 함락될지 몰라서 이승만 대통령을 제주도로 실어 날라 망명정부를 구성할 계획까지 미군이 논하던 그 시점에도 피난지 부산에는 '전시연합대학'이 꾸려졌다.

'전시연합대학'은 피난온 학생들과 교수들이 소속 대학에 관계없이 모여 각자 전공별로 공부를 계속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으며, 이후 다른 지역에도 비슷한 대학들이 꾸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지난해 우연히 길에서 한국전쟁 참전 군인이었던 캐나다인 노부부를 만나 사진을 찍어드린 기억이 있다. 그 분은 폐허만 남았던 한국이 이렇게 발전한 것에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기적'이라는 말을 거푸 언급했다.

전쟁이 남긴 피해를 극복하고 빠른 시간 안에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찾는다면, 전쟁터에서도 천막을 치고 대학을 세워 배움을 포기하지 않을 만큼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인의 자세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한글은 二四자'라 쓰인 허름한 칠판을 보며 자음과 모음을 익히는 1953년의 군인 아저씨들 모습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 각 사단이나 연대에는 한글을 깨치지 못한 병사들을 위한 '한글학교'가 세워졌다.
ⓒ 대한민국 육군

▲ 한글 자모를 배우고 있다. 칠판 오른쪽에 적힌 단기로 미루어 1953년 풍경이다.
ⓒ 대한민국 육군

▲ 나눗셈을 배우고 있는 병사들. 간단한 사칙연산을 바탕으로 한 산수 수업과 알파벳 같은 영어 수업도 이뤄졌다.
ⓒ 대한민국 육군

▲ 따로 학교를 지을 여건이 되지 않던 일선 부대에서는 간이 교실을 만들어 공부했다.
ⓒ 대한민국 육군

덧붙이는 글 | 기자는 국어능력 인증시험 시행본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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