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를 맡은 지수걸(공주대 교수) 선생님은 설명에 앞서 질문을 하셨다. 첫째, 이곳이 왜 650년 전부터 부안임씨들의 세거지가 되었을까요? 둘째, 이곳이 왜 6·25 전쟁때 금강방어선의 중요한 전투지가 되었을까요? 셋째, 이곳이 왜 행복도시로 선정 되었을까요?
이 세 가지 질문은 공통적으로 물길과 땅길이라는 자연지리적 요소와 관련이 있다고 강조하였다. 조선 후기까지 주요 교통로는 수로였고 이곳에 흐르는 금강은 해산물을 군산에서 시작하여 강경-공주를 거쳐 이곳까지 운반해줘 금강교 부근에 ‘대평리’라는 마을이 생기고 큰 장터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수로 대신 땅길인 도로와 철도가 만들어지는데 금남교는 1번 도로가 통과하는 다리이며, 인근의 신탄진 철도역은 대전과 조치원의 중간지점에 해당된다.
이런 이유로, 6·25 때 인민군과 미군이 처음으로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인민군은 이 강을 건너야만 대전, 전라도, 경상도로 빠르게 진격하여 미군의 주력부대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교통이 요지이고 넓은 평야와 강이 있기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살기에는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도시 건설청
독락정(가)에서 금남교 너머에 있는 행복도시 건설청(현위치)까지는 10분이 채 안 걸렸다. 전시관의 홍보 도우미 말에 의하면 행복도시는 고수부지를 제외한 여의도 순수면적의 23배이며, 중앙행정기관 12부 4처 2청이 2014년까지 이전한다고 하였다.
행복도시 예정지 안의 유물·유적을 답사하다가 정자에서 쉬고 계신 연기군 월산리 마을의 어른들을 만났다. "행복도시가 들어서면 원주민들은 어떻게 되나요?" 하고 조심스럽게 여쭤보았다.
"일단 예정지 안에 구역을 설정하여 원주민을 살게하여 준다니 그렇게 되겄지 뭐, 흩어진다고는 생각허지 않혀."
"여기서 우리 조상들이 650년을 살아왔는디 뭘 어떡혀. 앞으로도 계속 살아야지."
"정부 시책인디유 뭐 마음대로 할수 있깐. 뭐 예전처럼 살긴 힘들다고 봐야지."
행복도시 건설에 대한 입장과 반응이 모두 달랐다. 동네를 나오면서 “보상을 받아두 고향을 버리고 나가 산다는 게 쉬운 건가유”라며 반문하신 이장님의 말씀과 '행복도시'라는 단어가 자꾸 머리에 맴돌았다.
‘자연은 신이 만들고, 도시는 인간이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선조들이 물려주신 귀중한 자연속에 만들어지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자연과 인간을 해치지 않는 행복도시이기를 소망해본다.
덧붙이는 글 | 6월 24일-25일. 충남역사교사모임 선생님들과 함께 공주와 조치원 지역에 들어설 행정중심복합도시를 답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