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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일원은 명나라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면방직공업이 발달하였다. 그래서 현재에도 상하이 일원에는 의류 공장이 많이 있고 패션업이 호황을 이룬다.
상하이 일원은 명나라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면방직공업이 발달하였다. 그래서 현재에도 상하이 일원에는 의류 공장이 많이 있고 패션업이 호황을 이룬다. ⓒ 유창하

포동 동방명주 1층에 위치한 상하이역사박물관 입구 모습이다. 이 박물관 입구 오른쪽편에는 월드컵 붉은 악마들의 시청앞 대규모 거리응원전 대형사진이 부착되어 있다.
포동 동방명주 1층에 위치한 상하이역사박물관 입구 모습이다. 이 박물관 입구 오른쪽편에는 월드컵 붉은 악마들의 시청앞 대규모 거리응원전 대형사진이 부착되어 있다. ⓒ 유창하
중국 '상하이' 하면 모두들 황포강변에 들어선 상하이 개혁발전을 상징하는 거대한 탑인 동방명주를 떠올린다. 하지만 동방명주 1층에 가면 상하이 역사를 한눈에 쉽게 볼 수 있는 상하이역사박물관(上海歷史發展陳列館)이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이 전시관은 개항이후 상하이 근대사를 쉽게 이해하도록 청나라 시대의 상하이 주민생활상과 개항 이후의 상하이, 1920∼30년대 도시발전기 풍경 등을 실물로 착각할 정도로 잘 만든 밀랍형 구조물로 생동감 있게 꾸며 놓았다. 한국인들에겐 다소 생소한 중국 상하이 역사와 시대 풍물을 흥미롭게 관람하며 배울 수 있는 적합한 장소이다(입장료 35위안).

지난 25일 전시관을 찾았다. 이곳에서 1840년대 아편전쟁 발발 시기부터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 패전 시기까지 힘있는 국가와 힘없는 국가간의 시대상황과 시대생활상을 되짚어 보았다.


'아편 폐기처분 사건'과 상하이

청나라 말 아편을 피우는 아편흡연방이다. 샤오제(종업원)가 다리를 주무르고 있고 중독자들은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아편을 빨고 있다.
청나라 말 아편을 피우는 아편흡연방이다. 샤오제(종업원)가 다리를 주무르고 있고 중독자들은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아편을 빨고 있다. ⓒ 유창하
먼저 중국 상하이의 먼 과거를 알 필요가 있다. 상하이는 5∼7세기까지만 해도 작은 어촌에 불과 했다. 그래서 상하이를 지칭하는 별도 호칭으로 현재까지 '후(호)'라고 사용한다(후는 원시적 어업행위 사용 어구).

어촌에 불과하던 땅이 송나라 시대(960∼1126)에 이르러 비로소 상하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기 시작하며 13세기말 원나라 시대에 와서 장쑤성(江蘇省)의 한 구로 승격한다.

이후 명나라 시대(1368∼1644)에 들어와서 챵장(長江)의 삼각주 하구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면 경작지가 생겨나고 목화재배기술이 발달하여 포목상들이 생겨난다. 명나라 때 발달한 면직물은 청나라(1644∼1911) 18세기 중엽까지 이어지며 차, 도자기, 향료, 비단과 함께 외국과의 물물교환 주요 품목에 들어간다.

1825년 당시 중국에는 아편중독자가 무려 1백만 명 가량에 이를 정도로 중독자가 많았다. 이들에게 아편을 공급하는 상인들은 영국 상인들이었는데, 아편거래를 하던 중 영국 상인들이 아편대금인 중국 은화(銀貨)를 인도로 유출한 사건이 생겼다.

이 말을 들은 당시 청나라 황제 도광제(道光帝)는 전격적으로 영국 상인과의 아편무역 중단을 선언하며 상인들을 체포하고, 창고에 쌓여 있던 생아편을 모두 바다에다 폐기 처분해 버린다.

그러나 이 조치는 약소국 침략을 일삼던 대영제국의 노여움을 불러오고 이른바 아편전쟁을 일으키는 구실이 된다. 영국은 1842년 6월에 황푸강(黃浦江) 입구 우쑹(吳松)에 군함을 진주시켜 함포 사격을 가하며 점령하면서 무능한 청나라 조정에 치명상을 입힌다.

이렇게 시작된 아편전쟁은 우쑹을 지키던 군병과 민간인의 죽음을 무릅쓴 처절한 저항을 받지만 '화력 차이'로 중국의 참담한 참패로 끝나고, 난징조약 체결로 이어져 상하이를 조차지역으로 내어주게 한다.

서구 열강들의 '내 땅 선긋기 놀이'로 전락한 중국

상하이 황푸강 입구인 우쑹 앞 바다에는 서구 열강 군함들이 자주 출몰하였다.
상하이 황푸강 입구인 우쑹 앞 바다에는 서구 열강 군함들이 자주 출몰하였다. ⓒ 유창하
1842년 아편전쟁의 전과물인 난징조약은 중국 땅 상하이를 호시탐탐 신식민지로 노리던 서구 열강들로 하여금 '내 땅 선긋기 놀이'에 경쟁적으로 뛰어 들게 한다.

상하이에 조차지를 먼저 확보한 영국에 이어 1848년 미국 선교사는 와이바이두챠오(外白渡橋) 뒤편 홍커우(虹區) 지역 일원을 정식조약도 없이 일방적으로 미국조차지 경계선을 선포하고, 이어서 프랑스도 1849년에 프랑스령을 선포하며 조차지를 강압으로 할당받는다.

초기 영국과 미국의 조계지는 현재의 와이탄(外灘) 주변과 난징루(南京路), 홍커우 일부분 일원이었고, 프랑스 조계지는 화이하이루(淮海路)라 불리는 시 내륙 안쪽이었다. 늦게 진출한 일본은 홍커구(虹口) 지구(현 루쉰공원 일대)를 조차지로 장악한다.

하지만 첫 조계지였던 옛 지명 '양징방(洋涇浜)' 거리에서 머물지 않고 6년 뒤인 1848년 영국영사는 또다시 청나라에 조계지 확대를 강요하여 서쪽으로 현 시장난루(西藏南路), 북쪽으로 수저우허(蘇州河)까지 면적을 넓혀 나간다.

1848년 미국선교사에 의한 '구두 조계 경계선'을 확보한 미국은 이에 뒤질세라 1863년 상하이 지방관리를 위협하여 현 양푸(楊捕)일원을 포괄하는 조계지를 확정한다. 그 이전 초기 미국조계지는 사실상 미국선교사에 의해 구두로 선포된 것으로 국가간 어떠한 약정도 하지 않은 그야말로 '초 탈법적 불법강점'이었다.

영국, 미국에 이어 프랑스도 1849년 화이하이루(淮海路)와 헝산루(衡山路) 일대 첫 조계지에 만족하지 않고 태평천국란 이후 도로확장과 자동차 도로 건설을 민란 진압 등의 이유를 내세우며 일방적 강압으로 쉬자후이(徐家匯)까지 조차지 영역을 넓히고 헝산루 도로 확장 공사를 강행한다.

미영의 사법행정 총기구인 공부국 간판이다. 공부국은 민란을 진압하고 식민지 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두 나라가 합작하여 만든 통치기구이다.
미영의 사법행정 총기구인 공부국 간판이다. 공부국은 민란을 진압하고 식민지 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두 나라가 합작하여 만든 통치기구이다. ⓒ 유창하
이처럼 1943년까지 100여 년에 걸쳐 진행된 영국, 미국, 프랑스의 강압적 조차지 점령과 확장은 힘의 지배에 의한 일방적인 강점으로, 뒤에 조차지를 획득한 일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조계 총면적은 32㎢에 달할 정도로 광활하였다.

한편 조차지 지배국끼리 '영미 합동 공동선언'도 마다하지 않는다. 1863년에 이르자 영국과 미국은 와이탄과 홍커우쪽 일대 양국 조차지를 식민지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합병하여 영미공동조차지로 만들고 이를 관할하는 공부국(工部局)이란 사법행정 공동기구도 결성한다.

이 기구는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사법, 행정 총괄 총독기관으로서 자국인에게 적용할 뿐만 아니라 위법행위를 저지른 중국인에게는 자국 법을 적용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공동으로 공부국을 만든 이유는 다름 아닌 1854년 중국에서 민란인 소도회(小刀會) 봉기가 일어나 식민지 지배권에 위협을 느끼고 이에 대처하고 효율적으로 자국과 자국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외국인에게 테러를 가하는 중국인을 처벌하고, 외국인 공장에서 파업을 주동하는 공원들을 재판에 회부하였으며 각종 금지 조항을 위반하는 중국인들을 재판에 회부하였다(당시 와이탄 외국인 전용 황포공원에는 '중국인과 개는 출입을 금함' 이란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일단 소도회가 진압이 되자 1863년 미영은 다시 조계지를 분할하였다가 다시 식민통치의 효율성을 위한다며 다시 합병하는 공동조계 정책을 실시한다. 다시 합병한 2년 후는 영국과 미국의 고등법원까지 만들어 바야흐로 '도시형 식민지 국가'로서의 모양새를 갖춘다.

영미가 조계지역을 합한 후 개설한 공부국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중국인. 당시 인도인들이 상하이로 차출되어 재판정이나 거리에서 영국인들 수발을 드는 일을 도맡아 많이 하였다. 일제식민지 시절 한국인들이 전쟁터로 나가 일본군 수발을 들듯이...
영미가 조계지역을 합한 후 개설한 공부국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중국인. 당시 인도인들이 상하이로 차출되어 재판정이나 거리에서 영국인들 수발을 드는 일을 도맡아 많이 하였다. 일제식민지 시절 한국인들이 전쟁터로 나가 일본군 수발을 들듯이... ⓒ 유창하

덧붙이는 글 | [상하이 역사 돌아보기]는 3회에 나누어 연재를 할 예정입니다. 참조자료 및 도서로는 상하이전시관 자료,브리테니커 사전, 복단대학 발행 상해도시여행, 안그라픽스 상하이 등 입니다. 

이 기사의 사진들은 '상하이역사박물관'에 전시된 밀랍형 구조물들을 찍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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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 기간 오마이뉴스에서 쉬었네요. 힘겨운 혼돈 세상, 살아가는 한 인간의 일상을 새로운 기사로 독자들께 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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