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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가 감싼 지리산. 전남 구례와 전북 남원, 경남 하동, 산청, 함양은 지리산의 이름으로 한 권역을 이루고 있다.
운무가 감싼 지리산. 전남 구례와 전북 남원, 경남 하동, 산청, 함양은 지리산의 이름으로 한 권역을 이루고 있다. ⓒ 지리산 생명연대

여기 지리산에서 움트기 시작한 희망 씨앗이 있다. 지리산 함께 살아가는 전남 구례·전북 남원·경남 하동 사람들이 걸어온, 혹은 걸어가고 있는 작은 역사이다. 때로는 강과 물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때로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풀뿌리들의 이야기이다.

그 사람들이 지난 1일 전남 구례에 모여들었다. 환경운동가·농민운동가·노동운동가·공무원·시민·민주노동당…. 남원·하동·구례·함양·산청, 지리산을 둘러싸고 있는 3개도 5개의 시·군에서 주민들과 한데 어우러져 느릿느릿 지역을 변화시키고 있는 50여명의 사람들이다. 지리산생명연대·지리산권시민사회단체협의회가 구례KT수련원에서 주최한 '지리산 희망씨앗찾기'라는 주제의 워크숍이 열린 것이다.

이날 워크숍의 사회를 맡은 김봉용 지리산권시민사회단체협의회 운영위원장은 "문화관광부가 추진하고 있는 지리산권 관광개발 프로젝트에 의해 난개발이 우려되고 지방자치단체들의 막개발 움직임에 대해 주민들과 함께 공동대응할 필요가 있다"면서 "지리산권에 대한 공통의 인식과 대안 창출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이렇게 모였다"고 밝혔다.

이날 워크숍의 키워드는 지리산을 지키기 위한 '우리들의 역량 키우기'. 자연생태적으로 큰 가치가 있는 지리산을 지역주민들과 함께 보존해나가기 위해 필요한 공동 학습이 절실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이다. 워크숍 1부에서는 막개발이 지역 주민들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개발 논리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을 둘러싼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이호 도시연구소 연구원 사회로 진행된 2부에서는 '지역 주민의 경제 문제 해결 방법', '개발이 주민들에게 미친 영향' 등 학습안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오는 9월부터 섬진강 벨트를 경계로 남원·하동·구례-함양·산청으로 나뉘어 공동학습하자고 결정하고 자신이 속한 5개 시도 지역으로 다시 흩어졌다.

지리산 지킴이로 나선 이들은 그동안 각 지역에서 어떤 희망의 씨앗을 뿌려왔을까.

농촌에서 처음 시작한 '신용회복' 운동
- 전남 구례 민생인권상담센터


작년(2005년) 2월. 구례에서 한 상담센터가 준비모임을 발족한다. 그들은 농촌지역 신용불량자 구제 운동을 하겠다고 나섰다. 정부가 추진했던 각종 농정정책의 실패는 필연적으로 농가부채 문제를 파생시켰고, 부채를 탕감하지 못한 농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신용불량자가 되어갔다.

구례에서만 약 2000여 가구에서 신용불량자가 생겼고, 이들의 평균 부채는 약 2억원에 이르렀다. 이중 절반에 가까운 약 1000여 가구는 정든 땅을 떠났다. 어떤 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왜 이렇게 많은 가구에서 신용불량 사태가 발생한 것일까.

이대범 구례 민생인권센터 상담실장은 "가구마다 조금씩 사정은 다르지만 정부가 주도했던 농업시설 현대화사업에 참여했던 것이 주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시설투자비 규모가 큰 데다 이를 농민끼리 연대보증하고 하고 있어서 한 명이 무너지면 전체가 다 무너지는 게 필연적인 구조"라는 것이다.

구례 민생인권상담센터는 "이는 농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 농민의 문제"라고 판단하고 신용회복 지원운동에 나선다. 즉 농가부채 해결방안의 하나로 신용회복사업을 정하고 상담에 들어간 것이다. 농촌지역에선 처음 하는 사업이었다.

상담센터에선 개인회생과 개인파산을 신용회복의 유력한 방안으로 택했다. 통합도산법에 따라 법률적 구속력이 있어서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2006년 7월 1일 현재까지 상담센터에서 신용회복을 상담한 건은 모두 50여 건. 이중 18건이 법원에 서류를 제출하고 다음 절차를 기다리고 있고, 파산 선고를 신청한 1건은 면책대기 중이며 개인회생을 신청한 2건은 개시결정을 받아냈다. 서류보완 요구가 많고, 절차가 까다로운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다.

김봉용 소장은 "우리가 이 운동을 하는 이유는 농촌 신용불량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즉 "이런 문제를 안고 있는 이들이 구조적 인식을 통해 지역문제 등의 해결 주체로 떳떳하고 당당하게 나서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실장 역시 "농촌지역 신용회복지원운동은 농민의 삶과 상황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할 수 있는 지역밀착·주민밀착형 새로운 운동"이라고 자부했다. 말 그대로 절망의 나락에서 희망의 씨앗을 건져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귀농 운동은 이렇게 하는 거야
- 전북 남원 산내 귀농공동체


'시골마을에 아기 울음소리가 그친 지 오래'라는 말이 무색한 산촌(山村)이 있다. 2005년 말 기준으로 약 20여명(출생신고는 12명)의 아기가 태어났으니 말이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이 바로 그곳이다.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가능했을까. 산내는 귀농인구가 많은 지역이다. 98년 '실상사 귀농학교'가 문을 연 이래로 전국의 젊은이들은 하나 둘씩 산내로 향하고 있다. 산내면 인구 약 2000명 중 약 200명이 이렇게 귀농한 젊은이들. 새로 태어난 아이들의 부모 역시 대부분 귀농자들이다.

일부에선 산내지역의 사례를 '귀농운동의 전범'이라고까지 부른다. 일반적으로 귀농은 '퇴직 후 여유로운 전원생활'을 누리고자 하는 개별 욕구의 실현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산내의 사례가 앞 다퉈 언급되는 까닭은 생산과 복지, 문화가 나름의 조화를 이루는 귀농공동체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내 귀농공동체는 크게 다섯 축을 이루고 있다. 앞서 언급한 귀농학교, 생산공동체인 '실상사 농장', 대안학교인 '작은 학교', 유통판매공동체인 '생협', 그리고 복지공동체인 '사단법인 한생명(이하 한생명)'이 그 축이다.

특히 한생명은 보육시설인 '산내들 어린이집', 방과 후 교실, 지역주민을 위한 건강교실 등 다양한 교육사업을 통해 귀농자는 물론 지역 주민들의 교육과 문화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있다.

한생명의 한 관계자는 "지금도 귀농자와 지역주민과의 관계는 좋은 편이지만 '언젠가 떠날 마을'이 아닌 '우리 자식도 살아갈 마을'로서 받아들이기 위해 지역 알기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귀띔한다.

대안적 삶을 꿈꾸며 산촌마을로 귀농한 이들. 그들의 꿈은 아직도 실험 중이다. 한생명 관계자의 말처럼 이제 그들은 "어떻게 하면 이 지역에서 주민들과 함께 잘 살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골프장을 막아낸 '약속의 힘'
- 전남 구례 산동 사포마을 주민들


사포마을 주민들이 골프장 건설반대 집회에 참석, 연대투쟁을 하고 있다.
사포마을 주민들이 골프장 건설반대 집회에 참석, 연대투쟁을 하고 있다. ⓒ 지리산 생명연대
10억원이 넘는 재산가압류에도, 10건이 넘는 민·형사고발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주민들은 벌금형을 받고 불구속 입건이 되면서도 끝내 서로에게 했던 약속을 지켰고, 지금까지 골프장 건설을 막아내고 있다. 전남 구례군 산동면 사포 마을 주민들 얘기다.

지난 2004년 5월, 사포 마을 주민들이 골프장 건설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박운주 주민대책위 위원장은 "(골프장 건설예정부지) 그 물을 식수로 먹고 살아왔고, 그 물로 농사지어 자식들에게 보내왔는데 오염된 물을 어떻게 마시며 오염된 물로 농사지은 걸 어떻게 자식에게 보낼 수 있느냐"며 주민들이 골프장 반대운동에 나서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33가구 9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사는 사포 마을. 골프장 반대투쟁을 하는 동안 사포 마을 주민들은 온갖 아픔을 겪어야 했다.

2004년 9월엔 골프장 추진위 사람들이 마을로 몰려와 폭력을 휘둘렀다. 골프장 추진회사는 10억원이 넘는 재산가압류를 걸었고, 업무방해와 명예훼손 등의 이유로 14건의 민·형사고발을 했다.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고, 현재도 박 위원장과 그의 부인, 마을 이장 등은 검찰에 불구속 입건돼 있는 상태다.

박 위원장은 "반대운동을 하다가 재산에 압류가 들어와 실의에 빠져있는 주민을 보면 눈물이 났다"며 "그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가 제일 힘들었다"고 울먹였다. 온갖 아픔 속에서도 90여명의 주민 그 누구 하나 처음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 "우리 힘으로 골프장을 막아내자"는 것이다.

주민들은 올해 열린 두 차례의 주민설명회를 모두 무산시켜버렸다. 급기야 추진회사는 자기회사 별관에서 3차 설명회를 개최했지만 주민들은 '무효'를 선언했다.

지방선거 이후 주민들은 기대와 함께 새로운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 박 위원장은 "군수가 바뀌어 일단 한숨은 돌린 상태"라며 "이젠 마을 차원의 대책위를 넘어서 구례군 차원에서 골프장 반대대책위를 꾸릴 계획"이라고 전한다. "군 차원에서 쟁쟁한 많은 사람들이 골프장을 반대한다고 모이면 새로 당선된 군수가 골프장을 짓자고 쉽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섬진강 하동포구 80리 벚꽃길을 지켜내다
-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


하동-쌍계사에 이르는 벚꽃길 도로확장을 저지한 하동의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 실천적 대안으로 섬진강 생태학교를 운영하며 지역민과 함께 섬진강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사진은 생태학교에 참석한 학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하동-쌍계사에 이르는 벚꽃길 도로확장을 저지한 하동의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 실천적 대안으로 섬진강 생태학교를 운영하며 지역민과 함께 섬진강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사진은 생태학교에 참석한 학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
경남 하동에서 구례까지 섬진강을 따라 국도 19호선은 이어진다. 특히 봄이면 하동포구에서 쌍계사까지 이어지는 벚꽃길은 풍광이 그만이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벚꽃길이 4차선 도로 확장으로 추억 속으로 사라질 뻔 했다. 이 길을 지켜낸 이들이 있다. 지역단체인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과 지역 주민들이다.

부산지방국토관리청은 하동읍 광평리-악양면 미점리 9.7㎞ 구간과 악양면 평사리-화개면 탑리 사이 10㎞ 구간 등 총 19.7km의 국도를 기존 2차선에서 4차선으로 확장할 계획을 세웠다. 관광철에 교통정체가 심해 이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을 위시한 지역 단체들은 반대운동에 나섰다. "이 길은 벚꽃철에만 관광객들이 일시적으로 몰려 체증이 일뿐 평소에는 전혀 막히지 않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확장 사업이 본격화 될수록 환경단체들과 주민들의 반대여론도 거세졌다.

결국 도로확장은 일시 중단됐다. 절반의 승리였다. 도로확장저지투쟁을 이끈 이상열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 사무국장은 "도로저지투쟁은 가장 잘하면 일단 저지시켜 지금 공사를 못하게 하는 것이고, 못하면 공사가 바로 들어가는 것"이라며 씁쓸하게 승리를 자축했다.

도로확장저지투쟁 승리 이후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은 무조건 반대가 아니라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다. 이 국장은 "섬진강을 잘 알아야 섬진강을 사랑하게 되고, 섬진강을 사랑해야 섬진강을 지켜낼 수 있다"는 생각에 '섬진강 생태학교'를 시작했다. '강 해설가 육성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다.

이 국장은 "이 모든 것은 결국 지역 속으로, 지역민과 더 깊게 함께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지역운동의 역량이 취약한 하동에서 이 국장은 '더 깊게 지역 속으로' 들어가 시민의 힘을 키울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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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이 우리에게 돈을 가져다 줬나?"
'희망씨앗' 워크숍서 나온 말말말

"개발이 되면 주민들은 접시 닦고, 쓰레기 청소 하고…. 외지에서 좋은 옷을 입고 온 사람들을 보면서 심정적으로 위축되고, 이혼가정도 늘어난다. 자치단체는 세수확보차원에서 막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주민들에게 어떤 혜택이 돌아가고 있나."

이날 워크숍에 참석한 우두성 지리산권시민사회단체협의회 공동대표의 말이다. 그는 구례 온천지구를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꼽고 이를 추진한 지자체는 주민들도, 환경도 지키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장예리씨 역시 "노고단에 길이 생겼을 때 많은 지역주민들이 돈을 가져다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면서 "하지만 지금 주민들은 다 산 아래로 쫓겨와서 농업도 지키지 못하고 돈도 벌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고, 구례는 쓰레기 버리는 곳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이날 참가자들이 오직 반대와 한탄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 참가자는 "과거 농촌은 농산물 생산하는데 머물렀는데, 도시 사람들이 농촌에 원하는 것이 달라지고 있다"면서 "자연환경, 공동체 정신, 문화유산 등을 보존해 도시민들을 상대로 관광상품화할 수 있는 대안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우 대표도 "세계어디에도 산간지방에 위락시설이 성공한 예가 없다"면서 "지리산 개발에 몰두하기보다 휴양지 개념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원규 시인은 "지리산에 수십 개 축제가 열리는데 이를 분석해 점수도 매겨보면서 주민 참여를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대안을 내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호 도시연구원은 이날 워크숍을 마무리하면서 "여러분들은 '희망의 씨앗'을 찾기 위해 모였다는데, 오늘 토론을 보면서 이미 많은 씨앗들이 뿌려져 있는 것 같다"면서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고, 이를 잘 발아시키는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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