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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 농민의 역사> 겉그림.
<두레, 농민의 역사> 겉그림. ⓒ 들녘
지금 시대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양극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양극화는 말 그대로 양쪽 삶의 모습이 극한으로 다른 것이다. 어떤 이는 몇 억짜리 집이 작아서 이사를 가지만 어떤 사람은 천만 원짜리 전셋집을 날려 자살을 하기도 하는 시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양극화 시대의 모습이다.

빈부의 격차로 이뤄지는 양극화 말고 또 다른 양극화가 있다. 그것은 도시와 농촌의 양극화다. 도시는 세련된 이미지와 편리한 생활 그리고 더 낳은 교육과 취업을 보장하고, 많은 자본의 투자로 인해 기회의 땅이 된 반면 농촌은 오래된 이미지와 불편한 생활 그리고 적은 직장과 낮은 교육 여건, 적은 투자로 인해 기회라는 새가 떠나 버린 낡은 곳이 된지 오래다.

우리 사회에서 농촌에 대해 관심을 갖는 때는 농민들이 농토에 있을 때가 아닌 아스팔트 거리를 매울 때다. 또 농촌은 고향의 향수를 팔고, 도시에 살고 있는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의 관심을 충족해줄 방송프로그램에서나 찾아가는 곳이 되어버렸다.

<두레, 농민의 역사>라는 책 한 권이 전해진 것은 한 달 전이었다. 8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농민의 역사라는 낯설지만 결코 싫지 않은 주제가 나를 흥분하게 했다. 그래 언제 농민의 역사가 한 번이라도 제대로 기록되어 본 적이 있던가? 어디 한 번 읽어 보자.

"구상에서 농민만큼 보편적인 존재가 없는 반면 그만큼 조명을 받지 못하는 존재도 드물 것이다" - <두레, 농민의 역사> P.32

삼국사기를 썼던 김부식이 살던 시대나 지금이나 밥 먹고 살기는 매한가지인데 농민의 역사가 우리에게 조명 받은 적은 그때나 지금이나 없었다. 농민이 생산한 밥 먹는 사람들이 그 밥을 생산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했던 것이 그 동안 우리 역사였던 것이다.

저자가 직접 찍고 수집한 사진 수백장이 함께 담겨 있다.
저자가 직접 찍고 수집한 사진 수백장이 함께 담겨 있다. ⓒ 조태용
그런 의미에서 주강현의 책 <두레, 농민의 역사>는 의미 있는 책이다. 저자인 주강현은 책을 통해 농민의 역사가 기록된 것이 없어 그나마 농민들의 조직이었던 두레를 통해 농민의 역사를 적어 보는 것이라고 했다. 20여 년간 답사와 채록한 구술 자료, 수백 장의 사진을 직접 찍어 가며, 말 그대로 발로 쓴 책이다. 하지만 두레라는 책은 존재하지만 더 이상 한국 농촌에 두레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레가 농민들의 삶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였다. 19세기 이후 상품화폐의 발전으로 품팔이 노동과 채무고용노동형태인 고지(雇只)가 급속하게 불어났다. 또 일제 식민지 정책에 의해 조선 사람의 힘을 결집 시키는 집단 놀이나 의례, 공동체적 관형을 왜곡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이 이루어졌으므로 두레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결국 두레는 1960년을 기점으로 농민의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두레의 전통은 아직도 농촌에 남아있다. 상부상조와 이웃간의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그것이다. 두레의 사전적 의미는 상부상조하는 농민의 공동체다. 누구나 아는 사전적인 의미다. 하지만 더 나아가면 두레 안에는 음악과 춤 그리고 공동체적 삶의 지향이 그대로 담겨 있다. 더불어함께 일하고 춤추면 지내는 공동체의 꿈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땅과 농민, 자연이 연대하는... 공동체를 꿈꾸는 두레의 꿈은 다시 올 수 있을까? P.473쪽 촬영
땅과 농민, 자연이 연대하는... 공동체를 꿈꾸는 두레의 꿈은 다시 올 수 있을까? P.473쪽 촬영 ⓒ 조태용
양극화 시대에는 모든 것이 개인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타인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 아닌 그들만의 고통이 되고 함께 사는 이웃에 고통이 있다 한들 내가 재미있고 행복하면 그만인 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나 언제까지 행복하거나 재미있을 수만은 없다. 내가 행복했던 그 순간에도 항상 고통 받는 누군가와 이웃이 존재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이 하루하루를 힘들게 한다.

공동체 사회에서 이웃의 아픔과 고통은 곧 우리의 고통과 아픔이 되었다. 그래서 그 고통은 개인의 고통이 아닌 공동체의 고통이 되어 공동체 안에서 치유 받고 위로 받으면 상처는 아물어갔다.

인간이 유토피아를 꿈꾼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밥 먹고 살만 하면 유토피아인 줄 알았던 시대도 있었고,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으면 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경제발전과 함께 오지는 않았고, 우리의 유토피아는 요원하기만 하다.

공동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 모델의 모습은 우리 선조들이 행했던 '두레'에서 찾을 수 있다. 한 마을 한 사회를 이루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하나가 되어 풍물굿을 치고, 함께 노동요를 부르며 일하는 사회, 계급적 차별과 돈의 차별이 아닌 하나가 되는 대동사회의 모습이 오래된 우리의 과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꿈을 실현 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곳인 농촌이 붕괴되고 있다. 그와 함께 더불어 일하는 즐거운 삶도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희망을 놓아버리긴 이르다. 다시 귀농을 꿈꾸고 두레를 꿈꾸며 공동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양극화 시대의 해법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두레 있었다. 그 해법을 찾고 싶다면 <두레 농민이 역사>를 읽기 바란다.

덧붙이는 글 | 농산물직거래 장터 참거래연대(open.farmmate.com)에도 올립니다.


두레, 농민의 역사

주강현 지음, 들녘(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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