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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한 쪽도 나눠 먹듯이 도시락도 나눠 먹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듯이 도시락도 나눠 먹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 조태용
"저 아닌데요."
"그래도 네가 대표로 맞아…."


초등학교 5학년, 그러니까 벌써 20년 전이다. 당시만 해도 도시락 반찬은 공유제로 인식됐다. 항상 맛좋은 도시락을 싸오는 아이들이 있었고 그 아이들의 반찬통은 공공의 반찬이 되기 십상이었다.

충분한 것보다는 부족한 것이 많았던 가난한 집 둘째 아들에게, 햄과 소시지 그리고 어묵과 노란 계란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반찬통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얼마나 자주 남의 도시락 반찬을 먹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반에서 가장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았던 내가 평소 싸움질을 잘한다(많이 한다는)는 이유로 공공의 반찬에 쉽게 손댈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히 기억난다. 물론 공공의 반찬을 가져오는 친구들에게 나는 '공공의 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었다. 가끔은 나도 남의 반찬이 싫은 때가 있었다. 그무렵 난 평소와 다르게 집에서 싸주는 도시락에 만족하며 성실하게 밥을 먹고 있었다.

뭐랄까, 뺏어먹는 것도 지겨웠다고나 할까? 어쨌건, 남의 도시락을 돌같이 여기고 내 도시락을 황금처럼 생각하며 먹었다. 내 도시락 반찬은 김치와 노란 단무지, 또는 콩 자반이 전부였지만 난 타고난 식성이 좋아 무엇이든 맛있게 먹었다.

저 빈 그릇엔 무엇이 있을까? 추억, 그리움, 포만감.
저 빈 그릇엔 무엇이 있을까? 추억, 그리움, 포만감. ⓒ 조태용
빈 손으로 가도 배불러 돌아왔던 소풍... "고마웠다, 친구들아"

그러던 어느 날. 전날 같은 반 여자 아이의 어머니가 학교에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우리 딸 도시락 반찬을 훔쳐 먹는 놈 때문에 아이가 학교에 안 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을 모아 놓고 그 아이의 도시락 반찬을 먹은 사람은 자진해서 나오라고 엄포를 놓으셨다.

당시 우리에겐 종아리나 엉덩이를 때리던 선생님이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웠다. 작은 교실 안에는 오랜 침묵이 흘렀다. 앞으로 나가는 아이가 아무도 없었다.

나가면 엉덩이에 불이 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당장 뺨이라도 한 대 내리칠 기세였던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설령 자기가 그 아이의 반찬을 빼앗아 먹었다고 해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시간은 참 느리게 흘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주위 시선이 하나둘씩 내게 쏠리는 것을 느꼈다. '아… 왜 그러지. 난 요즘 얌전했는데….' 그러나 '공공의 적'이었던 내게 그런 눈초리는 사실 '인과응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선생님도 아이들의 눈빛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아셨던 모양이다.

"조태용, 너 나와. 네가 평소에 자주 그랬으니까 대표로 맞아."

평소에 많이 빼앗아 먹었으니 대표로 맞으라는 것이다. 선생님은 나만 때리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반장을 불렀다. 결국 나와 반장이 대표로 맞았다. 한편으론 억울하기도 했지만, 그간 한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그 일을 계기로 다른 사람의 도시락 반찬에 관한 안 좋은 추억이 생겼기에, 남의 반찬을 돌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그 후로는 도시락 반찬 때문에 맞은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자취했다. 자취생의 비애는 도시락에서 비롯된다고 했던가. 내 도시락 반찬은 항상 김치, 김치, 김치였다. 가끔 집에서 가져온 멸치조림이 끼어들기도 했지만 3년 내내 기본 반찬은 김치뿐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 부모님이 주시던 용돈조차 거부할 정도로 철이 들어 있었다.

자취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소풍 때였다. 그때마다 준비해야 하는 '특별식', 바로 김밥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6번 소풍을 가는 동안 난 단 한 번도 김밥을 준비하지 못했다. 스스로 김밥을 쌀 수도 없었고, 김밥을 사갈 만한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풍 때마다 매번 친구들에게 김밥을 하나씩 얻어먹어야 했다. 하지만 고마운 친구들이 주변에 있었기에 소풍 가서 굶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친구들의 반찬통은 내 것이 되고, 내 반찬은 또 누군가의 반찬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 시절, 김칫국물에 젖은 책을 들고 다녀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고 반찬 하나 뺏겨 보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는 뺏기기보다는 빼앗아 먹은 적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동창생들을 만나면 지금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혹 이 글을 보는 친구들이 있다면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니들 도시락 때문에 맛있게 살았다. 그리고 도시락 반찬 빼앗아 먹어 미안하다. 친구야…."

덧붙이는 글 | 참거래장터에도 올립니다.(open.farmm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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