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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동일여고 재단 비리를 외치다 해직된 조연희, 박승진, 음영소 전직 교사들이 길거리 수업을 가졌다.
ⓒ 나영준
처음에는 11일(화) 오후 4시 20분에 길거리 수업을 하겠다고 연락을 받았다. 동일여고 재단의 비리를 외치다 2005년 해직된 조연희(42), 박승진(48), 음영소(48) 등 3인의 전직 교사가 길거리수업을 하는 날. 오후 2시경 급한 연락이 전해왔다.

"학교 측에서 학생들의 참가를 최대한 막기 위해 갑자기 단축 수업을 한답니다. 3시 반으로 시간을 앞당겨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장에 도착하니 학교 아래 공터는 재단 측의 입장을 지지하는 학부모들이 미리 집회신고를 해놓아 쓸 수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그들이 마련한 장소는 골목길의 한 귀퉁이. 하지만 아이들을 직접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는 선생님들은 결코 낙심해 있지 않았다.

"그간 4회에 거쳐 길거리 수업을 가졌지만 유인물로만 대신했던 아쉬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오늘 몇 명이 참가할지 모르지만 수업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쁩니다."

국어과목를 담당했고 이날의 수업을 실제 진행할 조연희 교사는 당소 상기된 얼굴이었다. 나머지 두 교사 역시 플래카드를 어렵게 설치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어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하나둘 내려오기 시작했다.

▲ 수업 내용을 꼼꼼하게 적고 있는 길거리 수업 참가 학생.
ⓒ 나영준
"어서 오렴. 아침에 수업할 유인물은 나누어 주었지? 이쪽으로 앉으련."

하지만 아이들은 곧바로 자리에 앉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였다. 학교 측에서 교감을 비롯한 교사들이 아이들의 발걸음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많은 취재진이 있어선지 물리력으로 제지를 하진 못했지만 시종일관 불쾌함을 표시한 이들은 아이들에게 손짓을 하며 귀가를 종용했다.

차풍국 교감은 "학생들이 걱정이 되어 나왔다, 여러 학부모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있고 학교에 불만을 토로한다"면서도 세 교사의 파면조치에 대한 질문에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걱정과는 달리 학생들은 속속 모여들었다. 눈치를 보다가도 수업의 내용이 궁금한 듯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수업이 시작될 무렵에는 50여 명이 넘게 불어나 있었다. 학교 측에서 길거리 수업에 참석한 이들에게 불이익을 줄지 모른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2학년 김 아무개양은 "그래도 올바른 주장을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어 용기를 냈다"며 수업과제를 펼쳐들었다.

이 날의 수업은 시인 윤동주의 <길>을 교재로 삼았다.

"여러분 우리 함께 읽어볼까요?"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닫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하략)


"여러분, 우리 모두는 앞을 가로막는 담을 가지고 살고 있답니다. 우리 각자의 힘든 담이 무엇인지 함께 이야기 해 볼까요?"

▲ 윤동주의 '길'을 제자들과 함께 읽으며 길거리 수업을 진행한 조연희 교사.
ⓒ 나영준
한 두 학생이 부끄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고 이어 다소 낯선 분위기가 가시고 있었다. 잠시 후 함께 하는 학생들은 좁은 골목을 가득 채워가고 있었다. 길을 돌아서까지 자리에 참석한 아이들은 어느새 250여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15개월 만에 수업을 진행한다는 조연희 교사의 목소리도 활기를 띄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자, 학습자료 뒤에 보면 G.O.D의 <길>이 있지요. 우리 함께 불러요. 그 친구들이 말하고 노래하는 길도 우리가 고민하는 길과 다르지 않답니다."

그렇게 모두가 함께 부르는 노래는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혹 못 가게 하더라도 꼭 참석하겠다는 2학년 이 아무개양도 "너무 즐겁고 행복한 수업이었다"며 "너무너무 잘 가르쳐 주신 선생님에게 감사드린다"고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수업이 모두 끝난 후 조연희 교사는 "1년 반만에 한 수업이다, 자발적으로 찾아와 준 학생들이 너무 고맙다"며 행복해 했다.

"이렇게 많이 와 줄지는 정말 몰랐어요. 힘이 됩니다. 오히려 다음 수업이 부담 됩니다(웃음). 윤동주의 '길'을 통해서 자신의 자아를 찾는 이야길 나눴는데 조금이라도 마음에 담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부모님들도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예쁘고 해맑은 걸요.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 험난하지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모두들 하나둘 돌아가는 길. 모든 것을 정리한 후였지만, 그녀는 끝까지 학생들에 대한 염려를 놓지 않았다.

"수업에 참가하고 싶어도 혹시 학교 측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고민하는 학생들을 보며 상처를 받을까 가슴이 아파요. 아이들이 주눅이 들어서.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자신보다 학생들의 처지를 걱정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느새 평범한 교사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잘 들었습니다, 또 만나요"라고 손을 흔드는 아이들이 조연희 교사의 얼굴에 웃음을 되찾아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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