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앞그림.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앞그림. ⓒ 천년의시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라는 표제시 제목과 관련하여 주(註)가 하나 달려 있었다. '호안 미로의 그림 제목'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는 오히려 시에 접근하는 데 혼란을 가중시킨다. 말하자면 이 시를 호안 미로의 그림에 링크(link)시키고 있는 것인데 시를 더욱더 어렵게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림으로부터 제목만 빌려온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일몰 무렵이던가/아이를 지우고 집으로 가는 길/태양이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갔다/그 후론 내 몸에 온통 물린 자국들이다 (…) 거미가 천천히 허공으로 빨려 들어간다/저, 불룩한 배를 터뜨리고 싶다/붉은 태양이 거미를 물고 사라진다/거미는 무거운 배를 끌어안고 천천히/태양의 산부인과로 들어간다/집게로 끄집어낸 태아들이/여름대낮 칸나로 피어난다"

우선 시작과 끝의 불일치를 경험할 것이다. 분명 앞에서는 '아이를 지우고'라 했는데 뒤에서는 '끄집어낸 태아들'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는 어떤 고통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시간상 도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1~2행/3~16행)

이러한 시간상의 도치는 그 배경상의 대비로 확연해진다. '일몰 무렵'과 '여름대낮'이 대조되는 가운데 그 대비의 축은 '나'와 '태아들'이다. 두 개의 고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고통은 '붉은 태양'(태양이 내 손을 잡고/붉은 태양이 거미를 물고/태양의 산부인과(에서) 집게로 끄집어낸)을 근원에 두는 것 같다. 고통의 끝은 참담한 '칸나'에 비유된다. '나'도 '칸나'가 되고 '태아들' 역시 '칸나'가 된다.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물'고 그 '거미'와 거미의 '아이'는 '칸나'가 되고 만다.

박서영 시인의 육필시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박서영 시인의 육필시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 박서영
'문다'라는 동사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두 가지 의미 맥락에서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상처'이고 또 하나는 '파열'이다. '내 몸에 온통 물린 자국들'은 '상처투성이'가 된 여성의 몸을 보여주며 '집게로 끄집어낸'이나 '관 뚜껑이 열리듯' '쫙쫙 찢어진 꽃잎'은 '파열된' 여성의 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거미의 배'로 환치되었던 여성의 몸은 '무덤'으로 재차 환치되는 듯싶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시집의 제2부는 온통 '무덤'이기 때문이다. 제목만 보아도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무덤 박물관 가는 길' '구산동 고분군 가는 길' '무덤 밖의 지도' '혼자서는 무덤도 두려운 내부다' '무덤 속으로의 긴 산책에 대하여' '수로왕릉 가는 길' 등 이러하니 말이다.

'무덤 박물관 가는 길'에서는 '무덤'이 상처로 도드라져 있거나 불거져 나와 있다. "생(生)은 모두/낯선 집게에 걸려 파닥거리다가 멈추는 것"이고 "내 등을 집어 올리는 묵직한 고통"이며 "땅의 상처, 아물지 않은 물혹들"이다.

무덤 박물관에서 만난 '광인'은 이승과 저승의 '영매'이다. 사람들이 '무덤'이나 '죽음'을 꺼리듯 '광인'을 꺼리는 것은 그 거리상 닮아 있다. 이 시만 두고 보자면 이승과 저승 사이에 '광인'이 있는 지경이다.

"비 내린 후의 풀밭에서/미친 여자는 발을 씻고 있었다/풀밭에 발을 담근 채/두 손으로 정성껏 맨발을 씻고 있었다 (…) 영혼의 이쪽과 저쪽의 영매(靈媒)인 듯도 한/흰 옷 입은 늙은 여자/그 여자와 연결된 생(生)의 안쪽에서는/여전히 폭우가 쏟아지고 있겠다" - '광인-무덤 박물관에서' 부분

그러나 '광인'인 이 '늙은 여자'는 사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그 어느 곳에서도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지경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파열'의 지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함부로 말을 걸거나/들여다볼 수 없는 얼굴"이고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얼굴" 즉 "얼굴에 흑자줏빛 저승꽃이 피어 있"는 사자(死者)의 얼굴인 것이다.

이 밖에 '숫눈'이라는 작품과 '왕따'라는 작품은 비교적 쉬이 읽히면서도 선명한 메시지가 있어서 읽는 이에게 무언가 호소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추천한다. 곱씹고 질겅이면서 읽고 또 읽을 만한 시이다.

덧붙이는 글 | * 지은이: 박서영 / 펴낸날: 2006년 6월 15일 / 펴낸곳: (주)천년의시작 / 출판사 홈페이지: www.poempoem.com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박서영 지음, 걷는사람(2019)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