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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최근 국내 미디어와 대중문화 전반에서 민족주의의 징후를 쉽게 찾을 수 있다. 6월 전국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독일 월드컵과, <주몽> <연개소문>같은 '고구려 사극'의 인기 열풍, 13일 개봉한 대작 영화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현상의 중심에는 공통적으로 노골적인 민족주의 정서에 기댄 '코리아 프라이드' 구호가 있다.

민족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동북공정과 독도 분쟁, 한미FTA 논란 등을 거치며 우리 사회에서 외세에 대한 거부감과 바른 역사관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월드컵이 대중의 결속력을 높인 지금, 건강한 민족주의는 한국인의 역동성과 사회 의식을 높이는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도 있다.

애국심을 선동하는 민족주의 마케팅

그러나 최근 미디어와 대중문화에서 범람하고 있는 민족주의 열풍은, 감성에 기대어 노골적인 구호나 애국적 영웅주의로 대중을 선동해 오히려 불편함을 자아내기도 한다.

월드컵은 다분히 정치적, 민족적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기 없는 K리그와 대조적으로, 대중이 유독 국가대표팀 경기와 월드컵에 열광하는 이유는 애국심이라는 주제가 안겨주는 집단주의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정작 국내 프로축구 발전에는 별다른 관심도 없던 미디어와 대기업이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 때가 되자 붉은 물결로 도배된 '애국 마케팅'을 경쟁적으로 펼쳤다. 지상파 3사가 방송 편성을 '월드컵 특집'으로 도배하고, 대표팀 경기 때마다 수백만 대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게 가능했던 것도 '대표팀의 승리=한국의 영광'이라는 내셔널리즘적인 정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축구보다는 애국심에 기댄 이런 선동적 마케팅은 한국이 16강 진출에 실패하자 금세 자취를 감췄다.

열광적인 민족주의 정서는 2002년처럼 생산적인 에너지로 발산되기도 하지만,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광기어린 폭력성으로 변하기도 한다. 한국대표팀이 16강 진출에 실해한 후, 논란의 핵심이던 '오프사이드 논쟁'을 둘러싸고 소신을 밝혔던 신문선씨가 여론의 비난에 휘말려 월드컵 기간 중 '강제 소환'당했다. 이 해프닝은 신씨의 해설가로서 자질이나 발언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개인의 표현 자유마저 마녀사냥당할 수 있다는 극단성을 잘 보여준다.

불편한 감상적 접근, 민족주의와 선동주의는 구분되어야

최근 대중문화에서는 '팩션'이라는 장르를 활용,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 한국 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5월 첫 방영한 MBC 사극 <주몽>이 시청률 40% 고지를 넘보는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지난 8일에는 <연개소문>이 방영 첫 회 시청률 20%를 돌파하며 '고구려 열풍'에 합류했다.

<주몽>과 <연개소문>은 모두 고대사를 풍미했던 걸출한 실존인물의 일대기를 다룬 '영웅주의 사극'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한국사에서 최대의 판도와 영향력을 자랑했던 고구려를 배경으로 민족의 진취적인 기상과 선조들의 영웅적 활약상을 부각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역사적 객관성이 결여된 채 작가의 주관적 역사관과 상상력, 지나친 민족주의 정서 때문에 드라마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

건국 신화와 설화에 바탕을 두었으며 판타지성이 강한 <주몽>의 경우 이런 논란에서 조금 자유로운 편이다. 그렇지만 역시 방영 초기 철기문화와 시대 복색 고증이 빈약하고 인물간 관계 구성이 적절치 못해 비판받았다.

이에 비해 정통 사극을 표방한 <연개소문>은 논란의 여지가 더 많다. 방영 첫 회부터 <연개소문>은 장쾌한 전투 장면과 공성전이라는 스펙터클로 대중의 시선을 잡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연개소문의 안시성 전투 참전'처럼 시대에 맞지 않는 묘사, 고구려 중심의 편향적 접근, 주인공에 대한 지나친 영웅주의가 우려스럽다.

'역사적 사실'과 '픽션으로서의 드라마'는 물론 구분되어야겠지만, <연개소문>이 '중국의 동북공정 비판'이라는 주제로 기획된 작품임을 감안할 때 제작진의 역사인식이 대중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아직 방영 초기이기에 더 두고 봐야겠지만, <연개소문>이 초반에 역사적 기록을 무리하게 임의대로 재구성하면서 보여준 민족주의 정서는 오히려 균형감각을 잃은 일방적인 역사관으로서 설득력을 잃을 위험도 크다.

이러한 대중문화에서 민족주의 정서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은 곧 내부의 단결을 호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공의 적'을 만드는 이분법적 사고다. 내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합리적인 사고 없이, 결과론에만 기대어 대중을 선동하는 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배타적인 국수주의로 흐를 위험이 높다.

한반도
한반도 ⓒ KnJ엔터테인먼트
13일 강우석 감독의 영화 <한반도>에서 드러난 노골적인 반일 정서는 이를 잘 보여준다. 대한제국의 국새와 경의선 준공을 둘러싼 한일간 정치적 갈등 및 음모론을 다루고 있는 미스터리 가상 역사물인 <한반도>는,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는 반일 감정을 자극하며 관객을 선동하려 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정작 현실감각이 결여된 감정적 묘사나 비약이 심한 구성, 교조적인 애국주의로 넘쳐나는 대사들은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일본의 역사적 죄과를 논한다'는 대의명분은 민족 정서상(혹은 상업적으로) 그럴듯할지 몰라도 주제를 받쳐주지 못하는 빈약한 논리와 대책 없는 이상주의는 영화를 맥 빠지게 만든다.

민족주의는 무분별한 국수주의나 배타주의와 구분되어야 한다. 민족주의를 바르게 성찰하고 반성하기보다는 깊이 없는 구호와 선동에만 기대고 있어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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