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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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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4학년인 태민이형과 1학년인 민선이랑 자전거를 타고 놀기로 약속했다. 태민이는 제법 의젓한 모습이고, 민선이는 뽀얀 피부에 귀엽고 예쁘다. 반면에 기현이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기현이는 소매가 없는 셔츠를 반바지 안으로 쑥 밀어 넣고, 냉장고에서 굵은 놈으로 골라 참외를 셔츠 안에 집어넣었다. 4개를 집어넣자 배가 불룩해졌다. 누가 볼세라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왔다. 꼭 엄마가 "기현아 뭐 하느냐"라며 부르는 것 같았다. 벌써 동네 어귀에는 태민이 형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대뜸 코를 씰룩거리며 기현이 곁으로 나가온다.

"야, 그거 뭐냐.'
"아무것도 아니다."
"뭐냐니까."

더 버텨서는 안 될 성 싶다. "참외."
"…."


둘은 아무 말 없이 하나를 꺼내서 돌로 내리쳐 반으로 나누었다. 민성이가 오기 전에 먹어 치울 셈이었다. 아직도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참외들이 기현이 배꼽 밑에서 꼬무락거린다. 참외의 찬 기운보다 엄마나 아빠에게 들킬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등골이 더 오싹해졌다. 참외를 다 먹기 전에 민성이가 자전거를 타고 들이닥쳤다. 기현이가 한 입 남은 참외를 입안에 밀어 넣으며 선수를 쳤다.

"야, 우리 저기 당숲에 가서 나눠먹자."
"3개나 있어."


그러고는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이미 몇 차례 집에서 엄마 몰래 먹을 것을 가지고 나와 친구들과 당숲의 나무에 올라 먹어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더위도 피하고, 자전거도 타고, 몰래 참외도 먹기에는 이곳보다 좋은 곳이 없다.

더위가 기승을 부려 논일이나 갯일을 나가기 어려울 때면 어른들도 이곳 당숲으로 모여들곤 했다. 비가 갠 뒤끝이라 모두 논밭에 나가고 지금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옛날에는 '참외서리'라고, 냇가에서 목욕하다 몰래 참외밭에 들어가 원두막에서 낮잠을 즐기는 귀 밝은 할머니 눈을 피해 토실한 놈을 따들고 냅다 물속으로 들어가 먹기도 했다. 장마 끝에 갠 날씨는 깨끗하다.

ⓒ 김준
요즘 아이들에게 당산나무가 무서울 턱이 없다. 바닷가에 가면 당산나무들이 잘 남아 있는 마을을 만날 수 있다. 기현이가 사는 태천리 마을의 당산나무도 잘 보전되어 있다. 시골 어딜 가도 그렇듯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를 듣기 어렵다.

옛날 같으면 비가 온 뒤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이면 좀이 쑤셔 안달이 난 아이들이 도랑에 나와 쪽대를 들고 고기를 잡고, 갯벌에 나와 펄 위로 머리를 내민 조개며 고막을 잡았겠지만, 태천리도 요즘 다른 마을들과 다를 바 없이 조용하다. 고추밭과 깨밭에서 간간이 풀을 뽑는 할머니들과 논을 둘러보는 할아버지들만이 눈에 띌 뿐이다.

시골의 당산은 산 위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태천리의 당산은 들판에 있어 땅신을 섬기고 있다. 한 뙈기의 땅이라도 갖고 싶어 하는 어민들의 마음을 나타낸 것일까. 기현이는 당숲 주변의 논들이 옛날에는 갯벌이었다고 아버지에게 들었던 게 생각났다.

그리고 당 할아버지가 갯벌을 논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이곳에는 320여년 된 팽나무와 멍구나무 등 나무 2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이곳 당은 영험하여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화를 면하게 해주고 큰 복을 가져다주었다고 전해진다. 200여 년 전에는 마을 주민 한 사람이 당숲의 나무를 벌채한 후 바다에 나갔다가 돌풍으로 배가 모두 파괴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사람들은 더욱 정성스럽게 당을 모시고 있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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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뒷산이 아닌 들판에 당신을 모신 것은 산신이 아닌 지신을 모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이 일대에서 농사를 짓고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제방이 생기기 전에는 당숲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을 것이다.

녀석들, 겁도 없다. 대뜸 지난 정월 보름에 당산제를 지내며 줄을 감아놓은 당산나무 앞 제단에 참외 3개를 모두 두더니 앞에 있는 나무를 오르기 시작한다. 4학년 태민이는 노련한 솜씨로 신발을 벗어 던지고 나무를 오른다. 팽나무 삭정이에 왼쪽 다리를 올려놓고 종아리에 힘을 주는가 싶더니, 왼쪽 손을 뻗쳐 닿을까 말까 하는 높이에 있는 나뭇가지를 잡아채고 올라선다. 그 위로는 나무가 자는 듯 누워 있어 엉금엉금 기어 올라갈 수 있다.

태민이와 1년 차이에 불과하지만 기현이는 손이 닿지 않는다. '어떻게 올라가나 보자'하는 생각으로 나무 아래에서 구경하던 내게 구원의 눈길을 보낸다.

어떻게 할까. 그래, 흥정을 해보자. "내가 올려줄 테니 참외를 반씩 나누자." 그런데 이 녀석, 내 거래 제안에 별 반응을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맹랑하게 "아저씨, 나무 잘 타요?"라고 되묻는다.

이 녀석이 뱉는 말을 풀어보면 간단하다. 참외는 주기 싫은데 나무 위로 올라가고 싶으니 밀어달라는 것이다. 거래를 더 이야기하면 속 좁은 아저씨로 비칠 것이 뻔하다. 나도 이미 생각했던 것이 있다. 녀석이 가져온 참외의 크기가 작은 아이의 머리통만하다. 이미 자전거를 타고 올 때부터 우물거리며 참외를 먹는 것을 봤던 터라 이 녀석들이 저것마저 전부 해치우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했던 것이다.

녀석을 밀어 올려줬다. 돌아보니 1학년 민성이는 샘이 났던지 옆에 있는 바위에 누워서 자세를 잡는다. "너도 올려줄까?" "쟤는 못 올라와요, 무서워서." 겨우 올라가 자리를 잡은 기현이 녀석이 보란 듯 폼을 잡고 하는 말이다.

민성이는 나무에 못 올라가서 속이 상한지 당산나무 앞 제단에 모셔둔 참외 중 제일 큰 놈을 하나 물더니 베어 먹기 시작한다. 나무 위에 있던 녀석도 참외를 올려달라고 안달이다. "너 지금 안 올려주면 너하고 다시 안 논다." "자, 받아."

기현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협박이다. 동네에 기껏해야 초등학생이 3명밖에 없는 터라 기현이형이 놀아주지 않으면 민성이에겐 놀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나이 차이가 나는 태성이형하고 놀 수도 없지 않은가.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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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이는, 같이 안 논다는 말 한 마디에 금방 꼬리를 내리며 제단에서 참외를 가져다 기현이에게 올려준다. 나무에 올라가지 못한 막내 녀석도 나무에 기대어 참외를 먹기 시작했다.

기현이 녀석이 나무에서 내려오려고 조심스럽게 발을 옮긴다. 그런데 한 손에 참외를 든 채 나무에서 내려오는 일이 만만치 않다. 이놈의 참외가 또 말썽이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제법 배가 부른 모양이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른 척했다.

"아저씨, 이거 먹을래요?" 버릇없는 건 여전하다. 어른한테 "먹을래요"가 뭔가. 얼굴에 온통 '나는 장난꾸러기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그래도 귀엽다. 그렇지 않아도 점심을 먹고 나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쏘다닌 탓에 배가 출출했는데, 잘된 일이다.

결국 이렇게 거래가 이뤄졌다. 맨 위에 올라가 있던 녀석도 반쯤 먹고 나서는, 못 먹겠다고 내놓는다. 복이 터졌다. 상표 이름대로 꿀맛참외가 틀림없다. 참외를 다 먹은 아이들은 나무에서 내려와 나무 주변을 자전거로 몇 바퀴 돌더니 마을로 사라졌다.

덧붙이는 글 | '이 여름을 시원하게' 응모글입니다.

☞ [기사공모] 2006 이 여름을 시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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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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