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꿔가는 현장보고서-16일간 전국일주] 공식블로그 바로가기
1999년 한밭(대전)에서는 위험한 상상이 떠돌기 시작했다. 한국은행의 원화, 나아가 미 연방정부의 달러에 대항하여 지역 공동체를 위한 화폐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일군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경제학자나 사회학자가 아니었다. 또 그들은 혁명투사나 활동가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저 경쟁에 지쳐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돈을 '두루두루 살피고 나누자'는 의미로 '두루'라 이름지었다.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화폐는 이긴 자가 이길수록 유리해지는 화폐이다. 이것은 소수의 이긴 자가 다수의 패배자를 지배하며 작동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돈이 많은 사람이 돈 벌기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돈이 없는 사람은 살자니 돈을 꿔야하고 돈을 꿀 때 일정비율의 이자를 내야 한다. 집이 없는 사람은 세를 들어 월세를 내거나 은행이자와 엇비슷한 전세를 들어야 한다.
여기에 협동과 나눔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 돈을 꾸지 않아야 하고 집을 장만해서 집세를 내지 않도록 해야 가난의 나락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돈은 이미 소수 몇 사람이 다 장악하고 얼마 남지 않은 돈을 가지고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예수가 현대자본주의에 재림한다하더라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부처는 자비를 설해보아야 지금 게임규칙에선 공염불이다. 하나님 나라와 불국토를 염원하는 그들이 어찌 중생을 국민기초생활수급권자로 내몰 수 있으리오. 기껏해야 은행이자나 집세로 먹고살 정도가 되면 그때 가서 이웃을 돌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성인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라는 것을 믿기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화폐 대신 이웃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기 위해 고안된 화폐를 사용하는 것이다.
돈이 없으면 나눌 수 없다?
퇴직금 탈탈 털고 사돈의 팔촌까지 돈을 빌려 막 식료품 가게를 개업한 임꺽정이 있었다. 그때 목수로 일을 하던 홍길동은 일거리가 없어 배를 곯고 있는 상황이었다. 임꺽정은 홍길동의 목수 기술이 필요했고 홍길동은 임꺽정의 식료품이 필요했다. 그런데 둘은 서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 그것은 간단하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돈을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대신에 잘 만들어야 한다. 한국은행처럼 승자독식의 규칙을 채택하면 또다시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도울 수 없게 된다. 자 이렇게 해보자. 딱 두 가지 약속을 하는 거다. 첫째 화폐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스스로 발행할 수 있게 하자. 즉, 벌지 않아도 필요하면 쓸 수 있게 하자. 둘째 이자는 없기로 하자. 이러한 거래과정을 그림으로 살펴보자.
지역품앗이 한밭레츠 10문 10답
1999년 10월에 시작하여 2000년 2월에 70여명의 회원으로 창립한 지역품앗이 한밭레츠는 현재 600여명의 회원이 가입되어 있으며 매년 약 5000건의 거래와 1억원 가량의 공동체 화폐 거래를 하고 있다. 대전의 주류 시장경제규모로 볼 때 아주 보잘 것 없는 거래량이지만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한밭레츠를 경험하며 이웃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며 협동하고 나누면 훨씬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2000년 창립당시 거래는?
처음부터 거래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 2000년 첫해 거래는 287건에 그쳤다. 가장 큰 이유는 공동체 화폐를 사용하기 위한 최소한의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거래방식도 낯설고 불편한데다가 서로 잘 알지도 못하니 선뜻 마음을 열고 나누자고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품앗이 만찬이라는 행사였다. 품앗이 만찬은 참여하는 가족이 먹을 음식 외에 2~3인분 가량의 음식을 더 준비해서 함께 나누어 먹는 것으로 시작한다. 함께 먹는 것은 서로가 경계심을 풀고 마음을 여는데 도움이 된다. 식사 후 자기소개를 한다. 이웃에게 난 무엇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도움을 받고 싶은지를 이야기 한다. 이때 사람들은 나눔을 위한 적절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소개가 끝나면 각자 이웃과 나누기 위해 준비한 물품을 내놓는다. 주로 재활용품이 많지만 이웃과 나눈다니까 소중한 자신의 보물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때 서로 물건을 가지려고 경쟁이 일어나는 수도 있어 이럴때는 경매를 한다. 물론 이때의 거래는 전액 공동체 화폐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품앗이 경매'라고 부른다.
2000년 287건의 거래는 대부분 품앗이 만찬에서의 거래였다. 격월로 치러진 품앗이 만찬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를 조금씩 알아갔고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다.
돈 대신 이웃을 떠올리기
살면서 무엇인가 필요하면 우리는 먼저 그것의 가격은 얼마인지, 나에게 돈이 얼마나 있는지를 따져본다. 그런데 한밭레츠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회원들은 다르다. 상품의 가격과 자신의 주머니를 뒤지기 이전에 이웃을 떠올린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한밭레츠 홈페이지의 "거래하고 싶어요" 게시판에 자신이 필요한 것을 올려 어느 이웃이 나누어 줄 수 있을지를 찾는 것이다. 모든 재화와 노동이 포함된다. 이것은 공동체 생활원리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인데 공동체가 파괴되어버린 지금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왔던 이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행위로 이해되곤 한다.
한밭레츠 초기 아주 재밌는 두루 거래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양방의사 2명이 한방의사에게 수지침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양방과 한방은 병을 이해하는 철학이 다르니 당연히 그 진단과 처방이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고 주장하는 풍토에서 이들은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며 사람들에게 더욱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밭레츠가 산파 역할을 한 대전의 민들레의료생협(http://mindlle.org)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수지침 공부를 매개로 만났지만 모일 때마다 서로 어우러져 사람의 건강이 이윤추구의 대상이 되는 의료현실을 안타까워했으며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을 실현하는 의료인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야기 했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며 의약분업사태가 한창이던 당시의 의료제도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으며 또 그들에게 건강상담을 받으면서 점점 이 의사들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의사라는 직분을 내세워 사람 사이의 관계에 위계질서를 세우려하지 않았다. 그저 이웃의 하나로 만나 삶을 나누었다. 공동체는 이들을 자신의 주치의가 되면 좋겠다고 여겼다. 의료인은 현행 의료제도의 문제는 의사 한 개인의 선의로 풀어가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이들은 의기투합하여 의료생협을 만들었다. 조직으로 보자면 한밭레츠 회원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대전충남지회 의료인들이었다. 한밭레츠 회원은 스스로 조합원이 되었으며 인의협 회원들은 초기 자산의 상당부분을 많은 출자로 책임졌다.
이렇게 해서 의료인과 지역주민이 협동하여 2002년 8월 민들레의료생협이 창립하였다. 민들레의료생협은 현재 850여명의 조합원이 1억 9천만원의 출자금을 모았다. 양한방의원을 운영을 통해 매월 100만 두루 가량의 공동체 화폐의 수입이 있으며 이 수입은 직원들의 급료의 일부로 쓰이거나 공동체 자원활동가에게 지급된다. 올해는 조합원의 요구에 따라 ‘젖니에서 틀니까지 예방과 치료를 동시에’라는 슬로건으로 치과개설을 준비하고 있다.
12년제 대안학교 꽃피는 학교
한밭레츠와 의료생협에 열심히 참여하는 그룹 중에 '친구랑 어린이집'이라는 공동육아조합이 있다. 그들은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떠나 초등학교를 보내야할 시기가 왔을 때 고민이 깊어졌다. 그들의 자녀가 공동체와 함께 협동하고 나누는 삶을 살기를 원했지만 지금의 초등학교는 대입시 수험생을 방불케 할 정도로 과도한 경쟁논리로 아이들을 황폐화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한밭레츠의 공동체 화폐명을 따서 '두루학교 준비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은 대전푸른숲 학교를 거쳐 지금 현재 꽃피는 학교라는 이름으로 충남 공주에 초등학교과정, 충북 제천에 중등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한밭레츠 내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거래중의 하나가 친환경농산물 거래이다. 이에 따라 작년에는 ‘건강한 먹을거리 나눔의 공동체 두루부엌‘을 실험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지금은 한밭레츠 내에 농부 모임을 안정화하며 또 다른 기회를 엿보고 있다. 또 한밭레츠가 조금 더 소규모 단위로 분화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따라 동단위 품앗이인 법동 품앗이를 가꾸어보려고 하였으나 현재 침체상태에 빠져있다.
작년은 의료생협의 보험청구 잘못으로 인한 의료기관 업무정지와 덧붙여 공동체의 여러 가지 실험이 좌절되거나 유보되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몇 가지 원칙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원칙은 한국주민운동의 역사와 경험을 간직한 정보교육원(http://conet.or.kr)주민운동의 원칙으로부터 배워왔으며 일부 덧붙인 것이다.
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오직 주민 스스로만 그들 자신을 도울 수 있다.
둘째, 지도력은 주민 자신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셋째, 주민은 조직을 통해 힘을 가진다.
넷째, 조직의 기초는 주민 자신들의 이해관계이다.
다섯째, 투쟁은 대부분의 경우 문제해결을 위한 불기피한 조처이다.
여섯째, 주민운동은 저절로 공공선을 지향하지 않는다.
일곱째, 협동과 나눔의 사회경제프로젝트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협동으로 문제를 해결해본 사람은 문제 앞에 또 다른 협동을 생각한다. 잘 알려진 스페인의 몬드라곤 공동체는 협동조합 지역사회로 유명하다. 스페인 내 연간매출규모 8위, 그리고 일자리 창출규모로는 3위의 이 소도시는 인구 2만5000명의 인구 중 8300여명의 인구가 협동조합 연합체인 몬드라곤그룹(Mondragon Corporation Cooperative·MCC)에 소속되어 있다고 한다.
한밭레츠로부터 시작된 대전의 협동과 나눔의 공동체 실험은 몬드라곤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고 있으며 협동과 나눔의 상상력을 키우고 있다. 한국으로 보자면 충남 홍성 문당리 일대의 풀무공동체, 서울의 마포공동체, 원주의 협동조합협의회 등이 살아있는 모범이며 학교이다.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어가면서 성공보다 많은 실패를 경험한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민중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지혜는 협동과 나눔이며 최악의 무지는 대립과 경쟁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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