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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용흥궁(龍興宮)' 대문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용흥궁(龍興宮)' 대문 ⓒ 이수앙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의 강화경찰서 왼쪽 담 옆길을 따라가다 보면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인 '용흥궁(龍興宮)'이 나온다. 이곳은 조선의 제25대 국왕이었던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곳이었다.

국왕의 장자로 태어나 왕세자가 된 게 아니라 다른 방법이나 사정으로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한다. '궁(宮)'은 왕이나 왕족이 살았던 곳을 단순히 일컫는 말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서울의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궁도 되지만 그의 아들인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의 잠저이기도 하다.

봉영의식(奉迎儀式)을 주도한 영의정 정원용의 비와 강화유수 정기세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봉영의식(奉迎儀式)을 주도한 영의정 정원용의 비와 강화유수 정기세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 이수앙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잠저로는 태조의 함흥 본궁과 개성 경덕궁, 인조의 저경궁과 어의궁, 영조의 창의궁, 고종의 운현궁 등이 있다.

잠저는 대개 왕위에 오른 뒤 다시 짓는다. 용흥궁도 원래는 3칸짜리 초가집이었으나 1853년(철종 4)에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지금 같은 집을 짓고 용흥궁이라 불렀다. 그 뒤 1903년(광무 7)에 청안군(淸安君) 이재순(李載純)이 중건했다.

용흥궁의 안채
용흥궁의 안채 ⓒ 이수앙
좁은 골목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둔 용흥궁의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이나 낙선재(樂善齋)처럼 살림집 유형에 따라 만들어졌다.

현재 용흥궁 대문 왼편에는 봉영의식(奉迎儀式)을 주도한 영의정 정원용의 비와 강화유수 정기세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용흥궁의 사랑채
용흥궁의 사랑채 ⓒ 이수앙
'용흥궁(龍興宮)'이라는 현판 아래 있는 대문을 통과하면 행랑채를 마주하고 안채가 있다. 돌계단을 올라가면 사랑채가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 가까이에 우물이 각 1개씩 있다. 사랑채의 오른편 계단을 올라가면 작은 비각 안에 '철종잠저구기(哲宗潛邸舊基)'라는 글이 적혀 있다. 철종이 머물던 곳이라는 표시다.

소박한 농사꾼이던 이원범(철종의 원래 이름)이 거주하던 곳이라 규모도 작고 근처의 집들과 다닥다닥 붙어 있다. 용흥궁 기와 위로 어지럽게 걸린 전선 모습은 화재 위험에 건물이 그대로 노출돼 있는 건 아닌지 우려하게 만든다. 주위에 음식점들도 많이 있고 몇 개 비치된 소화기에 먼지가 잔뜩 쌓여 있는 점도 그런 우려를 더하게 한다.

안채 옆 우물에 기대어 놓은 표식비, 보수 공사한 돌담의 시멘트가 갈라져 있는 모습, 찢어진 창호지, 낙서 흔적 등은 재위 14년간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를 바로잡지 못한 채 병사한 철종을 더욱 측은하게 느끼게 한다.

철종이 머물던 곳임을 표시하는 비각과 '철종잠저구기(哲宗潛邸舊基)'
철종이 머물던 곳임을 표시하는 비각과 '철종잠저구기(哲宗潛邸舊基)' ⓒ 이수앙

찢어진 창호지, 뽑혀진 표식비, 먼지가 소복한 소화기와 다닥다닥 붙은 옆집, 용흥궁 위에 어지럽게 걸린 전선. 한 나라의 임금이 거취하던 곳의 관리가 너무 허술하다.
찢어진 창호지, 뽑혀진 표식비, 먼지가 소복한 소화기와 다닥다닥 붙은 옆집, 용흥궁 위에 어지럽게 걸린 전선. 한 나라의 임금이 거취하던 곳의 관리가 너무 허술하다. ⓒ 이수앙

사랑채 위의 자그마한 정원에서 내려다 본 용흥궁의 전경. 어떤 사람들은 잡초로 무성한 이 정원에서 철종이 농사를 지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사랑채 위의 자그마한 정원에서 내려다 본 용흥궁의 전경. 어떤 사람들은 잡초로 무성한 이 정원에서 철종이 농사를 지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 이수앙

덧붙이는 글 | 이수앙 기자는 cpn문화재방송국 소속이며, 이 기사는 iMBC에 동시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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