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정신지체장애인의 인권은 없는 것일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정신지체장애가 있는 부부에게 18년간 일을 시키고도 임금은커녕 기초생활수급자 생계주거비와 장애연금도 가로챈 경북 상주시 모 양계장 주인인 박아무개(65)씨를 지난 7월24일 경찰에 고발했다.
이혜영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활동가는 "박씨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양계장에서 18년 동안 장아무개(56·정신지체 3급)씨와 박아무개(45·정신지체 3급)씨 부부에게 일을 시키고 임금은커녕 장씨 부부와 부부의 막내아들(정신지체 2급)에게 지급되고 있는 생계주거비와 장애연금 등도 가로채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이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경북지방경찰청 상주경찰서에 '횡령 및 근로기준법위반'으로 고소했다"고 밝혔다.
장씨 부부가 박씨의 양계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8년 3월. 장씨의 친척소개로 이곳에 온 부부는 새벽 6시부터 밤 9시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양계장 관리와 계분을 치우는 중노동을 해왔다. 하지만 박씨는 이들 생활을 봐준다는 이유로 4억1700만 원에 이르는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고, 30만 원 가량의 수급비와 장애수당으로 지급된 11만 원 등 1800만여 원을 고스란히 자신의 통장에 넣었다. 게다가 이들 부부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폭행까지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숨쉬기조차 힘든 '악취'속에서 18년간 산 지체장애 부부
이 사건이 수면위로 드러나게 된 것은 지난 5월 보건복지부의 지시로 기초생활수급권자 중 본인이 생계비 통장을 관리하기 어려운 장애인과 독거노인 등을 대상으로 지역별 10개소씩 샘플조사를 실시하게 되면서다.
장씨 부부의 통장을 박씨가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안 상주시 북문동사무소 사회복지전담공무원이 시정명령을 내리자, 이 통장을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장씨의 큰 아들(23)에게 돌려 줬다고.
큰 아들은 "부모님 이름으로 돈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처음 알게 됐다"며 "그 동안 부모님이 받지 못한 임금에 대해 따져 묻자 '나중에 부모님을 모시고 나가면 그때 집 한 채 지어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 13일 상주시청·북문동사무소 사회복지담당공무원 등과 찾은 장씨 부부의 숙소는 사람 사는 곳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했다.
가족처럼 생활했다는 주인의 말과 달리, 계분(鷄糞) 처리장 옆에 위치한 세 평 남짓한 방안에는 낡은 냉장고와 텔레비전, 선풍기와 낡고 헤진 옷가지가 전부였으며 벽면은 언제 도배를 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썩어있었다. 몰려드는 파리 떼와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악취가 진동하는 이곳에서의 18년간 삶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임금은 지급했는데, 지급한 기록은 없다?
이곳에서 만난 주인 박씨는 "이곳에서의 일은 실질적으로 나 혼자 다했다"며 "노동능력으로만 본다면 진작 쫓아냈어야 할 이들을 가족처럼 여기고 데리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일을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라고 주장했다.
그는 임금횡령에 대해 "초기 10년간은 60만원을, 4년 전부터는 70만원을 줬으며 아들이 이들을 데리고 나갈 때 집이라도 한 채 지어줄 마음을 갖고 있었다"며 "수급권 통장을 내가 관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비용 전부가 이들 부부 생활비로 들어갔으며 아들학비는 물론 대학교까지 보내줬다"고 말했다.
또 폭행여부에 대해서는 완강히 부인하며 "자기가 일을 잘못해 허리 다친 것을 가지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며 "온전치 못한 사람의 말만 믿고 오갈 데 없는 이를 가족처럼 거둬서 돌봐온 나를 파렴치범으로 몰 수 있는가, 장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어떠한 처벌도 받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씨의 이야기와 달리 장씨 부부에게 임금을 지급한 기록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두 아들역시 대학교에 입학한 적이 없었으며, 장애가 있는 둘째 아들의 경우 학비전액이 국가에서 지급됐다.
폭행 부분과 관련해서는 아무 증거도 확인할 수 없는 상황. 북문동사무소 사회복지전담공무원 역시 "일전에 장씨 부부를 만난 자리에서 폭행이나 학대를 받았냐는 질문을 했지만 맞은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며 박씨의 주장을 변호했다.
이에 대해 이혜영 활동가는 "사소한 위협에도 쉽게 겁을 먹는 정신지체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비장애인의 경우도 가해자와 고용관계에 놓여있고, 가해자 옆에서 자신이 폭행당한 사실을 말하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라며 "장씨의 이야기가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주인의 말만 믿고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횡령한 수급비와 밀린 임금을 아들과 상의해 지급하겠다고 약속한 박씨의 말이 뒤바뀌는 데는 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장애우권익문제소 측은 "지난 7월 15, 16일 두 차례에 걸쳐 장씨 부부의 통장으로 횡령한 수급비 1780만원을 입금한 후 박씨의 태도가 돌변했다"며 "'나 역시 선의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요구한 액수의 임금은 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이어 "더 이상 임금을 지급할 의지가 없다고 판단해 박씨의 비리내용을 담은 고소장을 대리인 자격으로 관할 경찰서에 접수했다"고 밝혔다.
"'성년후견제도' 등의 제도마련이 시급"
사후처리에 대해 최인기 상주시청 사회복지담당공무원은 "정신지체장애인의 경우 관리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조차 버림받고 학대 받는 일이 다반사"라며 "하지만 관할 관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한정적이어서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재 보건복지부에서 후견인·관리인 제도 등 정신지체장애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8월 중으로 하달한다고 들었으나 쉽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보건복지부는 "아직까지 실태조사 결과가 취합되지 않은 상황이며 정리되는 대로 대책 안을 내놓을 것"이라고 답했다.
현재 장씨 부부는 양계장을 나와 모처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고 있다고 한다. 장씨의 아들은 "양계장에서 나온 후 부모님의 표정이 몰라보게 밝아졌다"며 "맛있는 것도 사달라고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 동안 부모님의 장애와 무능력을 탓한 채 밖으로 떠돈 생활을 반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아직 제대한지 얼마 안 돼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지만 안정된 직장을 구해 그 동안 못한 효도 하며 살겠다"고 덧붙였다.
이혜영 활동가는 "자아형성이 되기 전부터 욕설과 구타가 난무하고 악취와 벌레가 들끓는 환경에 노출돼 생활해온 아들 역시 피해자 중 한 명"이라며 "사건이 알려진 이후에도 한동안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이 있을 수밖에 없던 상황에 무척 가슴 아팠다"고 말했다.
그는 "수급비 통장을 가해자가 만들어 수십 년간 횡령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태조사 지시가 있기 전까지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관계 공무원들의 명백한 직무유기"라며 "이와 같은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시정명령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횡령혐의로 고발조치 하는 원칙을 제정하는 등 강력한 제재조치가 있어야 하며, 이들이 지역사회에서 나와 생활할 수 있도록 '성년후견제도' 등의 제도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장애인 전문지인 월간 함께걸음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