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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연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며 밀랍처럼 차갑게 변했다. 작은 콧등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왕신복은 조용히 김충연의 표정을 살피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자신의 무릎을 세게 내리쳤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는 갑판의 난간 쪽으로 달려갔고, 김충연이 그 뒤를 따랐다.
"저 배의 돛을 우리가 사용하면 이 배를 움직일 수 있어. 저걸 잘라오는 거야."

그 말과 함께 왕신복이 도끼를 들고 다시 바다에 뛰어들었다. 배의 가운데 부분에 솟아오른 돛은 배가 물에 잠기면서 반쯤 수면위로 떠 있었다. 돛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삼베를 사용한 돛감(범포:帆布)도 찢어지지 않고 온전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왕신복은 물 속으로 들어가 갑판 중앙에 붙어 있는 돛대를 도끼로 내리찍었다. 돛대로 사용하는 나무는 강도가 우수한 참나무 계통의 상수리나무나 졸참나무를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큰배에는 다오목(多吾木)이라는 특수한 참나무로 돛대를 만들었다. 하여 왕신복이 몇 번이나 도끼로 내리쳤으나 돛대는 쉽게 부러지지 않았다. 몇 번을 내리쳐 겨우 반정도 잘라놓았다.

숨을 쉬기 위해 위로 올라와 기울어진 갑판에 몸을 기대었다. 그때 김충연이 타고 있는 배가 심하게 기울어지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밧줄이 더욱 팽팽하게 당겨지고 이어 침몰한 배가 물밑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동시에 김충연이 탄 배가 옆으로 심하게 기울었다. 여차하면 두 척의 배가 함께 물밑으로 가라앉을 형국이었다. 김충연이 난간에 붙어 서서 외치고 있었다.

"여기 배마저 가라앉을 것 같아."

왕신복은 잠시 망설였다. 여기서 밧줄을 끊어버리면 이 배는 아주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그러면 돛을 얻을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그대로 놔두었다간 성한 배마저 침몰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선 밧줄을 잘라야 한다. 그러기엔 너무나 아까웠다. 돛을 거의 반쯤 잘라놓지 않았던가?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데 언뜻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갑판에 올라선 그는 김충연을 향해 외쳤다.

"그 위에 남아 있는 밧줄을 마저 던져."

김충연이 밧줄을 던져주자, 우선 그것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 가운데에 묶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을 당겨 돛대의 맨 가장자리에 묶었다. 그리고는 배의 난간에 묶어 둔 밧줄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침몰해 있던 배가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서서히 물 속으로 내려앉던 배가 갑자기 멈추며 밧줄이 다시 탱탱하게 당겨졌다. 돛대에 묶어놓은 줄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돛대의 힘이 약해 우지끈, 소리와 함께 돛대가 부러지며 배가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돛이 바다위로 떠올랐다.

"이제 됐다."

그렇게 도끼로 내려찍어도 꿈쩍 않던 돛대가 단숨에 부러진 것이다. 왕신복은 신나게 소리를 내질렀다.

"어서 그 줄을 당겨."

왕신복이 헤엄쳐 갑판 위에 올라갔다. 둘이서 밧줄을 당겨 돛을 배 위에 올려놓았다. 돛은 직사각형 형태로 그 크기가 무척 컸다. 돛의 아래에는 상활대를 위에는 질활대를 달아놓아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돛의 중간에는 돛감이 매달려 있었다. 돛감 중간에는 3척 간격으로 20개가 넘는 활대를 꿰어 놓았다. 활대의 끝에는 아디 줄을 매달았다.

"아디 줄을 모아 연결한 이 채를 가지고 돛을 조작하는 것이지?"

왕신복은 여러 줄을 복잡하게 얽어서 모아놓은 아디 채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신라의 돛은 우수하여 역풍이 불때도 항해가 비교적 자유로웠다. 따라서 선원이 아닌 왕신복이나 김충연이 이 돛을 조작하더라도 쉽게 배를 움직일 수 있었다.

"이제 이 배를 움직이기만 하면 되겠군."

왕신복이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김충연의 어조는 여전히 차가웠다.
"문제는 어디로 향하느냐 겠지?"

"당연히 일본으로 가야지."

"이 배와 네가 가져온 돛들은 모두 우리 신라 것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우선 급한 불부터 꺼야 해."

"신라에 먼저 배를 닿게 해 이 사실을 알려도 늦지 않아."

둘이 언쟁을 벌이고 있는 사이, 옆에서 가는 신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물…… 무울……."

박영효가 깨어난 것이다. 김충연은 방금 잡은 다랑어에서 짜낸 물을 그의 입에 털어 넣었다. 비릿한 물이었지만 그는 맛있게 삼키고 있었다. 길게 심호흡을 하던 그가 이윽고 눈을 떴다. 그리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가 어디지?"

주위를 둘러보던 박영효가 김충연을 발견하고는 놀란 눈을 물었다.
"아니 대장척당주(大匠尺幢主)께서 어떻게……."

김충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야 정신이 드는 겐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옆의 왕신복을 바라보며 고개를 옆으로 내저으며
"옆에 계신 분은 못 뵈던 분인데……"

라고 말꼬리를 흐리자 김충연이 즉각 대답했다.
"우리 배에 함께 올라탔던 대당(大幢)어른이시네. 배가 달라 자네가 몰라 볼 걸세."

그러자 박영효가 앉은 채 고개를 숙였다. 왕신복이 찐쌀과 다랑어를 가져와 내밀자 박영효가 허겁지겁 그것들을 먹어 삼켰다. 음식을 먹으니 기운을 차린 모양이었다. 그는 일어나 갑판 위를 거닐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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