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경제를 살리기 위해 노사정 3자 '대타협'(빅딜) 추진에 나선 김근태 열리우리당 의장에게 여론의 뭇매가 쏟아지고 있다. 당내에선 "사전조율이 없었다"고 불만이고, 당 밖에선 "무슨 소리냐"며 눈총이다. 사면초가 형국이다.
어찌보면 예견된 일이다. 비판은 모두 일리있는 지적들이다. 가장 큰 문제는 김 의장 의도대로 재계에게 기업인 사면, 출자총액제한제 자산 6조원 이상 재벌의 계열사 경우 순자산의 25%를 초과해서 다른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 폐지, 경영권 방어장치 강화 같은 선물을 준다고 해서, 국민들이 바라는 투자 확대와 일자리 확충이 이뤄지겠느냐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회의적이다. 재계는 그동안 투자저해 요인으로 출총제 같은 기업규제, 외국자본의 경영권 위협, 국민들의 반기업정서를 꼽아왔다. 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정부는 물론 학계에서도 출총제가 기업의 실물투자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는 게 중론이다.
그런데도 재벌들이 억지까지 써가며 출총제 폐지에 목을 매는 것은 총수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재벌총수들이 5%밖에 안되는 적은 지분만 갖고도 수십개 계열사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계열사간 순환출자 때문이다. 출총제는 이 계열사 순환출자를 함부로 못하게 한다.
외국자본 위험론도 솔직히 이런 후진적 소유지배구조를 그대로 온존하기 위한 핑계거리에 불과하다. 반기업정서 탓도 억지이긴 마찬가지다. 일 예로 총수일가가 직접 비자금 조성을 지시하고, 유용한 현대차와 두산그룹을 나무라는 게 반기업정서란 말인가.
이성태 한은 총재는 최근 기업투자가 부진한 이유를 기업가정신의 실종에서 찾았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 같은 창업세대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돈 냄새를 귀신같이 맡았던 분들이다. 하지만 능력보다는 부모 잘만나 거대기업을 물려받은 재벌 2, 3세들은 수성도 힘에 벅찬게 현실이다.
손경식 대한상의 회장의 고백처럼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 근본 요인은 기업 스스로 수익모델을 못 찾기 때문이다. 돈이 눈에 보이면 전쟁터라도 달라가는 게 기업의 속성이다. 일자리 창출도 사람을 경쟁력의 원천으로 귀하게 여기지 않고, 비용만 까먹는 존재로 여기는 시각이 팽배해 있는 한 어렵다.
더 큰 문제는 시장경제의 룰이 깨지고, 법치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이다. 아무리 재벌총수라고 해도 비자금을 만들고, 분식회계를 하고, 회삿돈을 유용했으면 법의 처벌을 받는 것이 순리다.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이유로 선처를 하는 것은 또 다른 미래의 범죄를 잉태하는 것이다. '스타 플레이어'일수록 경기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 지난 1일 한신과의 경기에서 400호와 401호 홈런을 연달아 친 이승엽 선수라고 해서, 심판이 다른 선수들에 비해 볼 판정을 후하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탄식이 나올 정도의 재계 요구
김근태 의장으로서는 개혁진영의 비판이 더욱 아플 것이다. 그들과 태생적 뿌리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왕년에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인사들이 정부의 한미FTA(자유무역협정) 추진에 반대하는 격이다. 기대했던 재계의 반응도 신통치 않다.
김근태 의장이 대타협 추진의 첫단계로 방문한 대한상의의 태도를 보면 초장부터 싹이 노랗다는 생각이 든다. 요구사항만 잔뜩 늘어놓고, 정작 자신들이 내놔야 할 것에 대해선 모르쇠 작전이다. "기업들의 실태파악이 안됐다"며 어물쩍 넘어가 버린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재고, 4인 이하 사업장 근로기준법 적용확대 철회까지 요구하는 것을 보면 탄식이 나올 정도다. 대타협 추진에 앞장선 김 의장이나, 대타협의 파트너인 노동자 쪽은 안중에 없다는 태도다. 누구 말대로 김 의장이 너무 순진했는지 모른다.
김근태 의장이 자신의 정치적 자산에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정치적 승부수라 할 수 있는 대타협을 들고 나온 까닭은 무엇일까? 본인 말대로 서민경제의 어려움 때문이다. 너도 나도 여당의 지방선거 패배 이유로 서민경제의 주름살을 꼽았다. 김 의장이 우리당의 얼굴로 나선 뒤 전면에 내세운 게 서민경제 회복이다.
대타협이 순진하고, 무모했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야당과 대기업, 기득권 세력의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성장과 분배의 병행 추진, 양극화 해소 정책으로 정면돌파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정부·여당에게는 그럴 힘이 없다. 노무현 정부는 서민경제를 살리겠다고 양극화 해소 정책을 고집하는데, 정작 최대 수혜자인 서민들은 참여정부를 외면한다. 참여정부는 국민들로부터 돌팔매를 당해 마땅한지 모른다. 말로는 서민경제를 살리겠다면서, 실제론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흥미로운 것은, 분배는 무슨 말라비틀어진 것이냐며, 반(反)서민정책을 주장하는 한나라당이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는 것이다. 서민 울리는 부동산 투기병 잡겠다며 발벗고 나선 노무현 정부를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것도 한나라당이다. 국민의 5%도 안되는 땅부자, 집부자가 한나라당에 표를 던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나머지 95% 중 절반 이상이 덩달아 한나라당에 박수를 보내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이도 저도 어렵다면, 마지막 카드는 그냥 버티는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주기만을.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는 점이다. 경기는 미처 활짝 피지도 못하고, 바로 시들어버릴 조짐이다.
경기가 가라앉으면 가장 먼저,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서민들이다. 배 부르고 등 따뜻한 사람들은 큰 불편이 없다. 인위적 경기부양은 부작용이 워낙 큰지라 절대 금물이지만, 경기침체를 그대로 방관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1차 책임은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와 여당이다.
답답한 것은 정부도, 경제전문가들도, 뾰족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모두들 자기 주장만 하고, 상대방의 말에는 귀를 막는다. 그러면서도 속시원한 처방전을 내놓는 사람은 없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갈라진 말길들 속에서 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도리어 싸움을 붙인다.
대타협을 위한 우리의 과제
대타협은 본질적으로 고통의 산물이다. 대타협의 선구자들인 스웨덴이나 아일랜드, 네덜란드 모두 마찬가지였다. 극심한 혼란과 대립 속에서 최후의 카드로 선택한 것이 대타협이다.
발트해 연안의 스웨덴 휴양지인 샬츠세바덴은 1938년 스웨덴 노사정 대타협의 역사적 현장이다. 1930년대 스웨덴은 다른 유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경기침체에 따른 노사 갈등으로 긴장이 극도로 고조된 상태였다. 노조가 파업을 하면 사업주는 직장폐쇄로 맞섰다. 급기야 정부는 노사 모두에게 최후통첩을 보냈고 노사는 살기 위해 머리를 맞댈 수밖에 없었다.
샬츠세바덴 협약의 핵심은 두가지다. 노사 대표로 구성되는 위원회에서 노사분쟁을 자율처리하고, 노사에게 각각 파업과 직장폐쇄의 권한을 인정하되 단협이 유효한 기간에는 파업이나 직장폐쇄를 못하도록 했다. 1956년에는 노사간 중앙교섭을 통해 업종별로 최저 임금인상률을 적용하는 사회임금정책에 합의했다. 평화적 노사관계가 정착되고 지나친 임금인상이 자제되면서 기업들은 경쟁력이 높아졌고, 정부는 경제안정화를 이룰 수 있었다.
우리 모두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식 접근법에 익숙해 있다. 하지만 이런 해법은 갈수록 현실적 가능성이 낮아지고 있다. 상대방을 이 땅에서 완전히 밀어내지 못한다면,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윈-윈의 해법 외엔 대안이 마땅치 않아 보인다.
중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이다. 이도 저도 어렵다면 지금까지의 생각을 한번 바꿔보는 것도 괜찮치 않을까? 2008년 미국 대선경쟁에 시동을 건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은 2002년에 남편이 했던 것처럼 '문제는 아메리칸 드림이야, 바보야!' 공화당이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인 미국의 중산층을 나락으로 내몰았다는 뜻을 선거구호로 채택했다.
이제 우리도 각자에게 새로운 구호가 필요한지 모르겠다. "문제는 대안이야, 바보야!"
덧붙이는 글 | 곽정수 기자는 <한겨레신문> 대기업 전문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