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서구의 덕이동 만자고개 건너편 작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서면 아직도 텃밭을 가꾸는 옛날집들이 몇채 남아있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밭길을 따라 500여m 들어서니 여느 교회들과 어딘가 다른 느낌을 주는 작은 슬라브 건물 몇채로 된 교회가 있다. '베트남 교회', '몽골교회'라고 표기된 이 교회는 베트남 몽고의 외국인 노동자들의 행복요람이다.
반갑게 맞아주는 이곳의 행정목사를 담임하고 있는 이숙희 목사에게 "게르방"이라는 뜻을 묻자 '게르'란 '이방인''나그네'라는 뜻이고 '방'이라는 뜻은 순수한 우리말 '방'에서 붙인 말이란다.
즉 이방인 나그네라고 할 수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아늑한 '방'처럼 느낄 수 있는 교회라는 뜻이다.
많은 외국인들 중에 유독 베트남, 몽골의 외국인들을 위한 교회가 된 데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는 질문엔 "'만남의 연'이 그렇게 시작되었지요"한다.
목사가 모두 여성인 교회
게다가 이 교회가 베트남 몽골인들만의 특수교회라는 사실만큼이나 색다른 것이 또하나 있다. 어느 분야나 남녀가 구별 없긴 하지만 이곳을 이끌어 가는 목사들은 모두 여성이다.
담임목사를 맡고 있는 함석신 목사와 행정목사를 맡고 있는 이숙회 목사가 게르방교회를 이끌어가는 두톱인 셈이다.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섬세함과 자상함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데 한몫을 톡톡히 한 것도 사실이라고.
게르방교회가 이렇게나마 안정된 방(?)을 갖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 우리나라에 와서 이방인처럼 떠돌며 어렵게 살아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선교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순전히 외국에 나가 선교사업을 벌이겠다는 함석신(56) 목사의 국내에서의 첫출진(?) 이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다는 정보 하나로 공장을 찾아가 말도 통하지 않는 그들을 끌어안겠다는 마음하나로 이일을 시작했다. 함 목사가 외국인 노동자들을 처음 만났던 1979년엔 제대로 된 건물하나 없이 허술한 창고 하나를 임대하여 선교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반응이 어땠느냐는 질문엔 복음을 전하고 싶어 어떻게든 의사소통을 해보려는 절박한 마음이 낮선 외국에 와서 마음 둘곳 없던 그들과의 소통을 훨씬 수월하게 만들지 않았겠냐고 반문한다.
도시락 하나에 마음을 담아 선교활동 나서다
어렵게 공장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함 목사가 건넨 선물은 마음이 담긴 손수 만든 도시락이었다. 1주일에 2~3회 여건이 닿는 데로 손수 만든 도시락을 들고 그들을 찾는 함 목사의 진심이 처음 만난 몽골노동자들의 마음의 불을 지피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이곳 덕이동에 일산가구공단이 위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이게 되었고 자연스레 모인 10여명의 노동자들과 만남이 이어지면서 자기들에게 무언가 해 주려고 한다는 진심이 통했는지 몽골 통역사를 대동하고부터 그들은 봇물 터지듯 그간의 외로움이나 어려움 등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쉼 없이 노동자들을 만나 나가자 자연스럽게 자기들 간에 서로 연결이 되면서 입소문을 타고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함 목사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도시락배달은 그 후로도 2년여간 계속 되었다.
가족단위 삶을 도와주기 시작하다
그 이후 조금씩 지원되는 개인후원자들이 생겨나게 되면서 좀더 규모있게 선교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함 목사는 이후 연을 맺게 된 베트남 노동자들까지 포함하여 어느새 80~90명쯤 모여든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나은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어 가구단지 내에 조그만 컨테이너를 구입하여 20여명이 살 수 있는 쉼터 공간을 마련하였다.
나머지 노동자들은 그들끼리 공동숙소를 정해 있기도 하고 따로 방을 얻어 살기도 했다.
노동자들과의 지속적인 교류가 이어지면서 가족단위의 노동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들의 자녀들도 하나 둘 입국해 들어왔다. 그러면서 자녀들의 외국체류에서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상담해주게 되었다.
이들 가족들이 한국에서 최소한의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전담 통역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통역사라 해서 특별한 사람을 고용할 형편도 되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몽골현지인들 중 여건이 좀 낫고 입국한지 오래되어 한국어가 가능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직접 신학을 전공시켜 선교사로 육성하는 방법을 택했다.
아이들이 행복해지는 선교활동을 펼치다
한두 가족이 모여들게 되면서 어느덧 가족단위 노동자 여덟 가족이 모였다. 자연스레 입국한 아이들의 교육이 문제가 됐다.
아직 언어가 소통되지 않는 입장에서 아이들이 공부도 공부지만 즐겁게 또래의 아이들과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무언가 스스로 열중할 수 있는 공간마련이 시급했다. 교회공간 이곳저곳을 살려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하나둘 마련 해 갔다.
자연스럽게 한글반이 생기고 미술교실이 생기고 아이들의 교육문제가 자리잡아가자 외국인노동자들도 이곳 생활에 적응해갔다. 이들이 학교생활에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자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의 질도 윤택해져 갔다.
공장일에 지치고 어둡고 침침한 공간에서 삶의 환희라고는 찾기 어려운 생활에서 밝고 행복한 가정을 영위하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이들에게 축복이었다.
수요일에는 한글교실, 목요일은 어린이 미술교실, 피아노 치기를 원하는 어린이들에겐 피아노 교실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뒷바라지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써갔다. 이제 아이들은 밝고 건강하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은 그렇게 이곳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인근의 덕이초등하교, 일산중학교 등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아이들 뿐 아니라 가족들 모두 공동체의 삶에서 만들어 갈 수 있는 체육대회, 장기자랑, 축제, 만남의 장 무엇이라도 선교에 통할 수 있다면 힘을 다했다.
그밖에도 침술봉사 등의 의료봉사도 펼치고 있으며 체불급료상담 및 여러 가지 체류 중에 생길 수 있는 상담 등도 해주고 있다.
게르방 교회 측의 이런 생활 속의 선교활동은 이제 이들 베트남, 몽골인 노동자들에게는 하나의 빛으로 또 마음의 평화를 얻는 복음을 전하는 '토'로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이방인이 행복한 교회', 게르방 교회를 이끌어가는 6명의 행복을 나르는 전사들의 하나같은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