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동안 여인의 운명은 한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남편과 아이의 수발을 드는 것이었다. 한번 결혼한 여인은 죽을 때까지 한 남편만을 섬겨야 하며 남편이 죽으면 평생 혼자 살면서 남편을 잊지 못하는 미망인이 돼야 한다고 권장됐다. 인류의 오랜 역사 내내 굳건하게 전해져 내려온 유구한 전통이다.
그러나 모든 여인이 이 유구한 전통을 순순히 따른 것은 아니었다. 여인들 중 일부는 한 남편만을 섬기며 평생 그에게 순종하는 삶을 참을 수 없어 했다. 그래서 남편 외에 애인을 만들기도 했고, 아예 결혼하지 않으면서 여러 남자를 애인으로 삼기도 했다.
어떤 여인들은 힘과 권력을 얻고 싶어서 여러 남자와 성관계를 맺었다. 어떤 여인들은 사랑 때문에, 또 어떤 여인들은 육욕 때문에 두 명 이상의 남자와 성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세상은 이들을 통틀어 '창녀'라고 불렀다.
역사에 등장하는 여인들이 현모양처 아니면 창녀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백 명 이상의 여자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카사노바는 은근히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인생을 진정 즐길 줄 알았던 예술인쯤으로 회자된다.
그러나 뛰어난 예언자였던 카산드라나 탁월한 정치력을 겸비했던 그리스의 전설적인 미녀 아스파시아, 예수의 일대기 중 중요한 장면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는 언제나 이름 앞에 '창녀'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녀야만 했다. 그리고 '창녀'라는 수식어가 붙는 순간, 그녀들의 이미지는 추하고 값싼 무엇인가로 전락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나고 지위가 향상되면서 역사 속 여성을 다시 고찰하는 작업이 활발하다. 확고했던 남성 중심 사회에서 한 남자에게 헌신하면서 얌전히 의식주를 기대지 않았던 여성은 모두 창녀로 불렸다는 사실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진보한 의식은 이제 단순히 '창녀'라는 한 단어로 정리되었던 그녀들을 개별화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던 때, 여성 스스로 힘과 권력을 쥘 수 있는 방법은 매춘밖에 없었다는 환경적인 요인도 충분히 감안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밑바닥의 시선으로 소용돌이의 시대를 엮어낸 세밀화
<르네상스 창녀>에 등장하는 피암메타 비앙키니는 프로 창녀였다. 그녀는 자기 외모의 힘을 어린 시절부터 깨닫고 십분 활용해 자신의 인생을 풍요로움과 권력으로 채운다. 역경이 닥쳐오는 순간에도 빠른 판단과 결단력으로 위기를 모면하면서 치열하게 살아간다. 작가는 피암메타의 창녀성을 생생하게 재현해냄으로써 오히려 창녀의 상대방이었던 수많은 남성들의 이중성과 뻔뻔함을 드러낸다.
소설의 화자는 피암메타의 하인이면서 동업자인 부치노 테오돌디. 피암메타가 명성을 얻기 전부터 매춘사업을 함께 해왔던 작고 못생긴 불구의 난쟁이다. 추한 겉모습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을 희화화하는 과정에서 누구보다 빠른 계산과 처세술을 터득한 부치노는 피암메타의 중요한 측근으로 자리 잡는다.
두 번째 권을 펴들 때쯤이면 독자는 그가 단순한 화자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기점으로 기대치 않았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에 흥건히 빠져든다.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16세기 전반 이탈리아와 유럽의 역사를, 창녀와 난쟁이라는 밑바닥 인생들의 일상으로 촘촘히 그려나가는 작가 사라 더넌트의 솜씨는 놀랍도록 탁월하다.
댄 브라운이나 시오노 나나미에 비유되는 이 작가에게 비슷한 작가의 이름을 굳이 붙여줘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진주 귀고리 소녀>를 지은 트레이시 슈발리에를 들겠다. 미시사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리는 데 트레이시만한 작가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사라 더넌트를 같은 저울에 올려놓고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다.
한 가지 더 말하면, 이 책의 제목은 원래 제목의 의미와 상당한 거리가 있다. 첫 권을 읽을 때만 해도 원제(In the company of the Courtesan, '창녀와 함께 한 날들'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와 번역판 제목이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순전히 제목에 매혹되어서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창녀에 관한 내용이 중심이 아니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피암메타도 이 소설의 중요한 등장인물이다. 그러나 두 번째 권으로 넘어가고 흥건히 젖은 내 영혼을 꾹꾹 누르면서, 나는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제목이 '오역'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또한 매혹적인 경험이다. 비참함과 모멸감으로 일그러진 부치노의 인생에 단 한 번 사랑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순간 비로소 이 소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은 다시 한 번 체험해보고 싶은 짜릿한 전율이므로.
덧붙이는 글 | 참고서적: 니키 로버츠 <역사속의 매춘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