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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리 가족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기숙사 2층방
우리 가족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기숙사 2층방 ⓒ 김지영
“귀농 하면 한 일 년은 푹 쉬어라. 육 개월 정도는 도시에서 묻어온 몹쓸 독을 빼는 기간이다. 이 기간은 필수적으로 지켜라. 빈둥빈둥 방안에서 뒹굴기도 하고 하릴없이 이곳저곳 다녀도 보고, 가족들과 그동안 가지지 못했던 정말로 살이 닿는 시간들을 가져라. 여행도 하면서 말이다.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워커홀릭이다.

인정을 못하는 사람도 본인만 모를 뿐, 다 그렇다고 보면 된다. 정말 자신이 지독하게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 세상이 왜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사랑하는 시간보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더 가치 있게 보는지를 역설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지금이라도 당장 필요한 만큼 일하고 살 수 있다. 마음 속으로 가지고 싶은 것들 중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만 빼면 되는 일이다. 가지지 않아도 지금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은 육 개월은 구체적으로 먹고 살 것들에 대한 계획들을 세워라. 시골에서도 잡(job)은 잡아야 한다. 작물이든 짐승이든 말이다. 아무리 소박한 살림이라 해도 분명한 밥벌이는 있어야 한다.”

잘 아는 귀농 선배가 작년에 내게 던져준 충고였다. 선배의 조언을 충실히 따라야 했지만 나의 까칠한(?) 경제는 일 년 푹 쉬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교한 도시시스템을 벗어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서울에서의 대차대조표는 겨우 당기 순이익을 약간만 발생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땅과 집을 마련하고 나면 그야말로 나의 경제는 유동성 부채를 끌어와야만 하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다.(돈 벌면 귀농 하겠다는 분들께서는 이 대목을 유념하시길 바란다.)

어차피 나는 서울공화국에서 퇴출되어야 할 변변치 못한 CEO였던 셈이다. 그럼 집과 땅을 줄이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것은 변변치 못한 CEO들의 일관된 대답이면 족하겠다. 해 볼만큼 해봤다. 줄일 만큼 줄여봤다.

귀농 직후 시작한 유정란 배달
귀농 직후 시작한 유정란 배달 ⓒ 김지영
내가 사는 마을은 아직 완성된 마을이 아니다. 올해 말이나 가야 어느 정도 기반시설 공사와 현재 입주가 예정되어 있는(나처럼 전국의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오매불망 이 마을로의 낙향만을 학수고대하는) 21가구 중 8∼9가구가 올해 안에 완전한 이주를 계획하고 있는 진행형 마을이다.

무슨 마을인지는 다음 기회에 설명해 드릴 수 있다. 오늘은 나의 경제 이야기가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 가족이 지금 살고 있는 공간은 마을 안에 들어서게 될 (대안)학교의 기숙사 건물이다. 집은 9월에 완공될 예정이다.

하여간, 난 결론적으로 돈에 있어서만큼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아내는 내가 혼자 서울에 남아 한 일 년 회사생활을 하면 적어도 한참동안은 돈걱정 없이 살 거라며 은근히 국내산 기러기아빠가 되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아내와 아들 없는 서울살이는 애초에 내가 바라던 삶이 아니었다. 그 기간의 길고 짧음을 떠나서 말이다. (회사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곳이다) 그럴 거면 회사에 독하게 달라붙어 정년퇴직하고 전원생활을 하지 아직 한창 나이에 귀농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돈은 이제 나에게 중요한 삶의 가치는 아니었다.

나는 그만큼 아끼고 줄이면 가능한 일이라고 항변했고 아내 역시 ‘가족들은 흩어지면 안 된다’는 삶의 철학을 놓지 않았다. 나는 속절없이 부유하는 기러기를 면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시골로 내려왔다. 돌이켜보면 볼수록 잘한 선택이다.

그러나 시골로 내려왔지만 서울에서 번 돈은 반 토막이 더 나버렸다. 이것은 한 편으로 우울한 일이긴 하다. (예정된 일이기도 했지만) 내려오기 직전에 구해진 유정란 배달 일은 일당제다. 그나마도 일주일 중 월요일과 목요일만 한다. 나머지 날은 선배의 권유대로 놀면 될 일이기도 하지만 그건 이미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앞서 말했다. 그래서 마을 공사 일의 현장잡부를 시작했다. 이것도 일당제다. 잡이 두 개인 셈이다. 이름하여 투잡이다.

요즘 내가 두번째로 시작한 일이 삽질(?)이다.
요즘 내가 두번째로 시작한 일이 삽질(?)이다. ⓒ 김지영
오랜 세월을 에어컨 밑에서 일하다가 8월 땡볕 아래서 작업화와 소매가 긴 셔츠를 입고 고된 노동을 한 지 며칠이 지났다. 써보지 않은 근육에서 발생하는 피로의 문제도 문제지만 여름을 여름답게 보내지 못한 이 피부가 말썽이다. 몸 구석구석에는 땀띠가 생긴 지 오래고, 긴 노동이 끝난 후 샤워를 마치고 나면 연고를 구석구석 발라야 하는 처지다. 자연의 이치는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들에는 나쁜 점과 좋은 점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있는 법이다. 거친 노동 뒤에 오는 후련함은 가파른 산자락을 힘겹게 올라서서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에 비유될 듯하고, 육체 노동을 통해 얻는 약간의 돈과 머리를 쥐어짜서 얻는 과분한 돈의 상관관계가 보여지는 듯도 하다.

출퇴근을 위해 하루 서너 시간을 보내는 일도 없고, 건조한 조직생활의 이면을 살펴야 하는 일도 없다. 바쁜 회사 일로 잠든 아이의 얼굴만 보아야 하는 안타까운 일도 없고, 다른 즐길 거리들이 없어 먹고 마시는 일에만 몰두할 필요도 없다.

밥먹듯이 하는 수당 없는 야근도 없고, 부당한 업무에 무작정 따라야 하는 비겁함도 없고, 상사에 대한 지극히 형식적인 예의와 후배들의 싸가지 없음에 절망해야 할 필요도 없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함도 없다. 일하기 싫으면 일당만 포기하면 끝이다.

귀농 후 읽은 책들이다. 저녁시간은 언제나 여유가 있다.
귀농 후 읽은 책들이다. 저녁시간은 언제나 여유가 있다. ⓒ 김지영
하여간 도시의 화려한 불빛이 없는 시골에서는 밤이 되면 그야말로 깜깜하고 적막하다. 온전히 낮과 밤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가로등도 없는 이곳에서 밤이 깊으면 자는 일 말고 달리 할 일이 없다. 그리고 사람은 밤이 되면 자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밤에 일찍 자면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 초등학생도 아는 이 단순한 이치를 나는 시골로 내려와서야 깨달았다. 내 나이 마흔 하나에 말이다. 왜 서울에서는 일찍 자도 늦게 일어나야 했는지는 이제 어렴풋하게 알 뿐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하루가 참 길다. 긴 시간만큼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지금이야 이른 아침부터 일터로 나가야 하지만 초저녁 일을 마치고 나면 남는 시간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의 것이기도 하다. 단순하지만 행복한 노동은 그런 시간들을 풍요롭게 해주는 원천이다.

작물을 키워내는 일이나 혹은 짐승을 길러내는 일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듯하다. 어차피 뿌린 대로 거두어내는 점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에 불로소득은 없다. 일한 만큼만 나오게 되어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일생을 그렇게 살고 싶다. 불로소득에 대한 염원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것들을 놓치며 살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사는지를 단순한 노동을 통해서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몽식이, 개를 키울 수 있다는 것은 아들의 귀농결심에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몽식이, 개를 키울 수 있다는 것은 아들의 귀농결심에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 김지영
그래도 까칠한 경제를 타개하기 위해 아직은 2% 부족하다는 아내의 현실적인 고언을 받아들여 지금 밤을 새워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아내는 내 옆에 없다. 얼마 전 아들과 함께 일본 L사의 주재원으로 있는 마을 주민 집에 놀러갔다 오기가 무섭게 역시 아들을 데리고 친정 나들이를 갔기 때문이다.

서울 생활 내내 밥벌이를 함께 해야 했던 아내는 귀농하면 한 일 년 푹 쉬어 보라는 선배의 충고를 나 대신해서 충실히 따르고 있는 셈이다. 부족한 2%를 메우기 위해 자정을 넘기도록 노동에 지친 몸을 눕히지도 않고 바탕체 10포인트로 A4 3장째를 쓰고 있는 나를 홀로 남겨두고 말이다.

하여간, 이걸 잡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생나무만 아니면 작든 크든 돈이 생기니 시골살림에 잡이라고 할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관계로 일하기 싫어 선택한 귀농인데 어찌하다보니 투잡도 모자라 쓰리잡이 되었다는 결론으로 이 글을 맺고 싶으나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자.

지금 남쪽을 향해 열려 있는 창문 너머로 실루엣으로 비추는 소나무 사이로 노랗고 동그란 달이 정확히 걸쳐 있다. 가끔 밤을 가르는 새 소리가 들리고 엷은 구름은 달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날 고향집 부모님 곁에서 행복한 꿈에 젖어 잠들었을 아내와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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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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