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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에서 유일하게 낙조를 볼 수 있는 영일만 안쪽의 동네들. 임곡해안에서부터 구만리까지가 바다 일출은 없고, 바다 일몰만 있다. 사진은 임곡리에서 바라보는 POSCO쪽의 낙조.
동해에서 유일하게 낙조를 볼 수 있는 영일만 안쪽의 동네들. 임곡해안에서부터 구만리까지가 바다 일출은 없고, 바다 일몰만 있다. 사진은 임곡리에서 바라보는 POSCO쪽의 낙조. ⓒ 정태현
나날이 비를 만나는가 싶더니, 어느 듯 따가운 태양이 이 여름을 장식하려고 한다. 폭우에 "웬 여름이 이토록 시원한가"라고 했다가도, 결국은 폭서를 맞이하고서는 그리운 투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산으로 바다로, 내 집과 내 직장을 떠나 마음과 몸이 자연과 하나 되는 피서철. 더위를 피해 떠나는 자연의 세계, 이번에는 '호랑이 꼬리'라 불리는 동해안 최동단의 장기반도 '장기현'을 달리며 해안의 풍광과 역사적 흔적들을 돌아본다.

이번에 소개하는 '장기현'은 지금의 포항시 남구 대보면, 구룡포읍, 장기면, 동해면 일대에 있었던 옛고을의 이름이다. 사실 이 4개 지역은 오랜 세월 변함없이 역사의 동질성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려 초에 처음으로 '장기현'이란 이름으로 명명 되었다. 오랜 세월 같은 고을로 통치를 받아온 해와 달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장기현'은 지금의 포항시 남구 대보면, 구룡포읍, 장기면, 동해면 일대에 있었던 옛고을의 이름이다. 사실 이 4개 지역은 오랜 세월 변함없이 역사의 동질성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려 초에 처음으로 '장기현'이란 이름으로 명명 되었다. 오랜 세월 같은 고을로 통치를 받아온 해와 달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 정태현
포항의 POSCO를 지나다 보면, 동해면이라는 조그마한 면소재지를 거치게 된다. 영일만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동해면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시금석이 된 포항제철의 풍광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또 동해안에서 유일하게 해돋이가 아닌 낙조를 볼 수 있는 곳도 이 동해면의 바닷가다. 그 동해면에서 구룡포쪽 방향이 아닌 임곡해안을 따라 달려가면 '호미곶 대보'가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곳들 가운데 한 곳으로 신년초 해맞이 장소로도 유명하다.

특히 여기에는 국내 최대의 등대가 있고, 국내 유일한 등대박물관이 자리한 곳이기도 하다.

이 호미곶 해안을 달리다보면 서해와 남해에서 볼 수 없는 남성적인 동해의 풍경을 볼 수 있다. 동해의 시원함과 푸른색으로 가슴이 젖게 된다. 오랜 세월 변함없이 그 절경들을 자랑하는 해안의 멋스러움이 다른 지역과는 다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바닷가 정경은 도저히 사람의 손으로 빚을 수 없는 비경이다. 말 그대로 인간의 세계를 벗어난 신의 '선계(仙界)'를 연출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소용돌이마다 이 고장을 여행했던 문인들은 이곳을 '조선 10경의 하나'라고 했다. 문인들 중 하나는 이곳을 보면서 문득 초라하고 왜소한 자신의 모습을 느껴 하마터면 울 뻔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에 나는 호미곶에서 구룡포를 지나, 역사적 고장인 장기면에 이르기까지 직접 지나면서 주변의 절경과 오랜 우리 역사의 숨소리를 찾아 3편의 글에 담아보고자 한다.

[제1편] "호미곶, 버림의 고장에서 희망의 고장으로"

장군바위(將軍巖).
장군바위(將軍巖). ⓒ 정태현
호미곶을 가기 위해서는 동해면에 속해 있는 몇 개의 마을을 지나치게 된다. 이때 주변에 보이는 바위들이 아무 곳에 위치해 서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동해의 거센 파도가 닥칠 때마다 그래도 꿋꿋이 견뎌온 듯하다.

아니, '장기현' 민초들의 삶을 대변이라도 해 온 듯이 홀로 외로이 서 있다. 그래서 입암(立岩), 선바위(서 있는 바위), 선돌(서 있는 돌) 등의 이름이 붙은 선돌바위나 장군바위 등이 주변과는 달리 의지력을 표현하는 듯하다.

구만리에 들어서려면 고개 재를 하나 지나가야 한다. 이곳을 지나면 꼭 전쟁터를 지나가는 것 같은 과거가 보인다. 이곳은 '대보 폐기물 설치 반대위원회'가 똘똘 뭉쳐 수년간을 가산을 탕진하면서 막아낸 투쟁의 장이었다. 어찌됐던 그것이 결과적으로 비록 지역민들의 님비현상(NIMBY : Not in my back yard)이었다고 해도, 당시 지역민들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버림의 고장, 대보면이었다.

고갯마루를 내려오면서 멀리 보이는 끝이 우리나라 장기반도의 가장 위쪽 끝 지점이다. 이곳을 지역사람들은 '까꾸리계(鉤浦溪)'라고 부른다. 호미곶 등대로 가는 길에서 바로 앞 바닷가의 선착장으로 통하는 마을길을 따라 500m 남짓한 거리에 있다. 까꾸리계로 가는 길은 시멘트 포장길이고 입구가 넓지 않아 아는 사람이 드물다.

먼저 동해면을 지나 대보면에 들어서면, 첫번째 마을이 대동배이다. 대동배 포구에 몰려 있는 꼬마선 통통배는 대동배 사람들의 삶의 전부이자 희망의 돗단배다.
먼저 동해면을 지나 대보면에 들어서면, 첫번째 마을이 대동배이다. 대동배 포구에 몰려 있는 꼬마선 통통배는 대동배 사람들의 삶의 전부이자 희망의 돗단배다. ⓒ 정태현
호미곶은 반도의 동쪽 끝 툭 튀어나온 지점이다. 그래서 1년 내내 바람 잘 날이 없다. 까꾸리계는 바람이 몰아치면 파도가 일고, 이 파도에 물고기들이 쓸려 나오면 까꾸리(갈고리)로 끌어 담을 정도로 고기가 많았던 데서 비롯된 지명이란다.

마침 이곳에는 독수리 바위가 있다. 형상이 당장이라도 날아 오를 듯한 모습이 독수리와 같다. 거칠긴 하지만 세월이 멋드러지게 깎은 셈이다. 해질녘 독수리 부리에 걸리는 낙조는 사진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멋진 소재일 듯했다.
마침 이곳에는 독수리 바위가 있다. 형상이 당장이라도 날아 오를 듯한 모습이 독수리와 같다. 거칠긴 하지만 세월이 멋드러지게 깎은 셈이다. 해질녘 독수리 부리에 걸리는 낙조는 사진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멋진 소재일 듯했다. ⓒ 정태현
한가한 느낌을 주는 대보항. 이 항구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마주보며 서 있는 흰색, 붉은색 등대는 낭만의 장소이기도하다. '땅 끝이자, 바다의 시작점'인 호미곶은 그 경치만으로도 일상에서 탈출한 사람들의 가슴을 뚫어 놓기에 충분하다.

지난 2000년 '새 세기'를 맞이하는 기념으로 만든 '상생의 손'이 호미곶 광장과 그 앞 바다에서 마주보며 서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아니라도 우리나라 한반도의 동쪽 끝이라는 것만으로도 호미곶은 이제 희망의 땅이다. 슬픔을 벗어내는 곳, 새로운 모습을 전하는 자리, 사랑을 보듬는 약속의 공간이다. 모든 걸 걷어내고, 새로운 마음을 먹고, 의지를 가지며, 희망의 새 출발을 위해 호미곶을 사람들이 찾는다.

우리나라 남녘 땅 가운데 제일 동쪽으로 돌출한 땅 끝, 그리하여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먼저 아침 해를 맞이하고, 동해의 늠름한 파도가 처음으로 땅과 만나는 곳. 여기가 '장기곶'이다.

원래 생김새가 말갈기와 같다 하여 장기곶으로 불렸으나, 이러하듯 민족의 정체성을 살리고자 '호랑이 꼬리'라는 인식을 위해 영일군수를 지낸 서상은씨가 주도하는 '호미수회'라는 단체에서 역사성을 강조하며 이름 변경을 추진하였다. 지난 2001년 12월 지금의 이름으로 공식 변경했다.

일찍이 16세기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는 <산수비경>에서 백두산은 호랑이 코,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기술하면서 천하의 명당이라 하였다. 육당 최남선은 백두산호랑이가 연해주를 할퀴고 있는 형상으로 이곳을 '호랑이 꼬리'라고 이름하였고, 영일만의 일출을 조선 10경 중의 하나로 꼽았다.

모든 과거가 뒤안길로 사라진 지금의 장기곶은 밤이면 오징어잡이 배가 앞바다에 불을 밝히고, 아침이면 밤새껏 그물질한 얼마간의 물고기를 실은 몇척의 통통배가 작은 포구로 돌아오는 갯마을이다.
모든 과거가 뒤안길로 사라진 지금의 장기곶은 밤이면 오징어잡이 배가 앞바다에 불을 밝히고, 아침이면 밤새껏 그물질한 얼마간의 물고기를 실은 몇척의 통통배가 작은 포구로 돌아오는 갯마을이다. ⓒ 정태현
그러나 호미곶은 역사적으로 비운의 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장기곶을 포함한 장기반도 전체가 장기현에 속했다. 그때 장기는 나라에 필요한 말들을 기르는 목장이 있었을 뿐 풍토가 사납고 거칠었다. 여기에 기후마저 불순하여 '샛바람에 말이 얼어죽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몹쓸 땅이었다.

'구만리'라는 지명이 말해주듯 정치와 문화의 중심부에 있던 사람들에겐 구만리처럼 멀리 느껴지는 변방이었다. 왕조 세대에 이 땅이 쓰이는 길은 단하나, '유배지'였다.

흔히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라고 하면 강진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분이 18년의 긴 유배생활을 시작한 곳이 바로 여기 장기현이다. 그 동안 다산은 거친 풍토와 무료한 시간과 싸우며 여러 풍속시를 지었다. 18년 '다산학'의 출발지가 이곳 장기현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장기곶에서 기억해야 할 역사의 인물 중 또 한사람이 고산자 김정호이다. 그는 실증적 경험을 합쳐 이룩한 위대한 유산인 대동여지도를 만들 당시 장기곶과 죽변곶, 이 두 곳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동해로 튀어나왔는지를 재려고 죽변과 장기사이를 일곱 차례나 오갔다고 한다. 그 결과가 대동여지도에 정확히 반영되어 장기곶이 더 튀어나오게 그려졌다.

장기곶에 서면 살아서는 불우하고 외로움이 깊었던 선각자의 커다란 뒷모습이 보인다. 이곳이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의 시체가 버려진 곳이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의 실패 후 일본으로 도피했던 김옥균은 1894년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에 의해 피살된 뒤 그 시체가 청국 정부에 의해 국내로 송환되었다.

송환 후 김옥균의 시체는 양화진에서 다시 온몸이 여섯 토막이 나는 능지처참을 당하여 전국에 효시 되었고, 그때 그의 왼팔이 버려진 곳이 장기곶 앞 바다였다. 이유는 동해로 튀어나온 장기곶의 지세에 역모의 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안타까운 호미곶의 역사이다.

여기 한적한 동해바다 끝 동네에 그나마 사람이 찾아드는 건 나라 안에서 두 번째로 불을 밝힌 등대가 있기 때문. 위 사진은 등대박물관 조감도.
여기 한적한 동해바다 끝 동네에 그나마 사람이 찾아드는 건 나라 안에서 두 번째로 불을 밝힌 등대가 있기 때문. 위 사진은 등대박물관 조감도. ⓒ 정태현
여기 한적한 동해바다 끝 동네에 그나마 사람이 찾아드는 건 나라 안에서 두 번째로 불을 밝힌 등대가 있고, 하나뿐인 등대박물관이 있기 때문이다.

버림의 고장이었던 대보. 이젠 희망의 고장 호미곶이 되고 있다.
버림의 고장이었던 대보. 이젠 희망의 고장 호미곶이 되고 있다. ⓒ 정태현
한때는 청해진 대사 장보고가 동아시아의 해상권을 주름잡을 만큼 일찍부터 해상교통이 발달했던 우리나라지만, 등대가 등장한 시기는 매우 늦다. 광무 7년(1903) 인천 앞 바다의 소월미도와 팔미도에 처음 등대가 세워졌으며, 그해 12월에는 이곳 장기곶에 두 번째로 등대가 건립되어 불을 밝혔다.

장기곶 등대와 나란히 한 등대박물관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등대에 관한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특수박물관이다. 2층 전시실에서 밖으로 연결된 베란다로 나가면 바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갯내음 가득한 공기와 희망을 깊게 들이마실 수 있다.

'버림의 고장'이었던 대보…. 그러나, 이젠 희망의 고장 '호미곶'이 되고 있다.

구룡포에서 대보로 가는 도로를 편도 2차선인 4차선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하지만 곳곳에서 선사시대 유적지가 발견되면서 문화재 발굴을 위해 도로공사가 중단되고 있다. 그래도 수없이 찾아드는 관광객들을 위해 넓히는 도로처럼 이곳 사람들에겐 이제 희망의 고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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