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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영양의 숨통을 끊은 솟은 서둘러 이를 끌고 나무 아래로 몸을 피했다. 새끼를 잃고 화가 난 어미 영양이 달려올지도 몰랐고 다른 포식 짐승들이 먹이를 뺏으러 달려올지도 모른다는 본능에서였다. 솟은 문득 키가 다른 짐승들에게 자신을 해치지마라고 해놓았다는 얘기가 떠올라 조금은 경계를 풀 수가 있었다.

솟은 키가 돌아 올 때를 기다리며 익숙한 솜씨로 영양의 배를 가르고 피를 뺀 후 고기를 돌로 찢어발기며 불속에 던져 넣어 익혔다. 오래간만에 맡아보는 구수한 고기 냄새가 솟의 코를 찔렀지만 솟은 키가 오기 전까지 영양고기에 입을 대지 않았다. 그것은 키에 대한 솟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였다.

-키! 여기 와서 이것 좀 먹어.

마침내 물을 구하러 갔던 키가 돌아오자 솟은 반갑게 맞이하며 고기를 건네었다. 키는 솟과 고기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고기를 받아들고 입에 넣었다.

-어떻게 구한건가?
-몸도 나아지고 해서 사냥해온 거야.

키는 말없이 고기를 먹었고 솟도 오래간만에 먹어보는 고기를 게걸스럽게 뜯었다. 먹을 만큼 먹은 후에 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만 여기서 떠나야한다.

솟은 갑자기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키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어딜 가자는 것인가? 곧 해가 진다.
-이곳의 생명과 내가 맺은 약속이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약속을 못 지키게 되었으니 여기 머물러 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솟은 급하게 남은 영양고기를 챙기며 키를 뒤쫓았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렇다면 영양을 사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나? 왜 미리 얘기해 주지 않은 건가?
-......생명과 대화하는 법은 천천히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또 다시 알쏭달쏭한 키의 말이 이어질 듯하자 솟은 넌덜머리를 내며 다른 말을 던졌다.

-그렇다면 기왕이면 수이가 잡혀 간 방향으로 가자 이곳은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가는 것 아닌가.
-수이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솟은 우뚝 멈춰서 더 이상 키를 따르지 않았다. 키는 그런 솟을 뒤돌아보며 솟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제 그만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낫겠다. 난 수이를 찾아야 해.
-나 역시 그러기를 바라기에 너를 도와주는 것이다.

솟은 잠시 주춤거리더니 품속에서 날카로운 돌을 꺼내들고 키를 위협했다.

-그래! 이젠 떠나라. 너의 도움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키는 솟의 손에 들린 돌을 보고도 주춤거리는 기색도 없이 고요한 눈으로 솟을 바라보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키의 눈에 솟은 차마 더 이상 위협하는 태도를 보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내 도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라. 그것이 생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시작이다. 이 땅을 급히 떠나는 것은 다른 생명들을 설득하기가 어려워질까 그런 것이다. 어린 생명은 가급적 사냥하지 말았으면 했지만 그것까지 일일이 말해줘 봐야 아직은 네가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다.

-대체 내게 도움을 주어서 뭘 얻으려는 것이지?

키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상대를 조롱하거나 낮게 보는 비웃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배려한다는 화해의 웃음이었다.

-지금, 모든 생명들은 내가 아니라 너희 종족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솟은 항상 그렇듯이 키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를 떠나 수이를 찾아가겠다는 성급한 마음은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었다.

-너희 종족이 교만함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 희생으로 앞으로 바라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왜 너희 종족은 스스로 그러지 않고 우리 종족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가? 너희들은 다른 생명들과 소통이 가능하지 않나?

키는 고개를 올려 어느덧 캄캄해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처럼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 종족은 앞으로 오래가지 못한다. 난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너희 종족은 크게 번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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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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