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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판소리의 주인공 안숙선 명창. 안 명창의 소리를 듣고자 청중들은 자정까지 귀가조차 잊었다.
심야판소리의 주인공 안숙선 명창. 안 명창의 소리를 듣고자 청중들은 자정까지 귀가조차 잊었다. ⓒ 김기
무대 혹은 멍석 위라면 어떠랴. 속옷까지 흠뻑 젖고만 찜통더위에 작렬하는 조명과 바짝 다가앉은 옆 사람의 열기까지 더해져도 국립극장 하늘극장에 모인 인파들은 이미 더위 따윈 까맣게 잊어버린 듯 했다.

한여름 밤의 명물로 자리 잡은 국립창극단의 심야판소리. 올해는 작년까지 창극단 예술감독을 지냈던 창극 프리마돈나 안숙선 명창의 <흥보가>로 일찍부터 귀명창들의 구미를 당겼던 공연. 12일 밤 8시 국립극장 야외극장인 하늘극장에서 동국대 최종민 교수의 사회로 소리판을 열 때부터 이미 객석은 열기로 후끈 달아 있었다.

이번 심야 완창판소리는 안숙선 명창의 창극단 내 제자들과 함께 꾸며 사제 간의 두둑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는데, 뜨거운 객석의 기대에 제일 먼저 소리불을 당긴 정미정부터 시작해서 김차경, 이영태 그리고 작년 남원춘향제에서 판소리부문 대통령상을 받은 유수정에 이르기까지 4명의 명창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스승의 무대를 열어갔다.

김소희제 흥보가를 나눠부른 안숙선 명창의 제자들.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정미정, 이영태,김차경 국립창극단 명창들
김소희제 흥보가를 나눠부른 안숙선 명창의 제자들.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정미정, 이영태,김차경 국립창극단 명창들 ⓒ 김기
이들이 부른 흥보가는 국창 김소희 선생의 호를 따 만정제라 부른다. 만정제 흥보가를 나눠부른 순서로는 정미정이 '초압'부터 '돈타령', 김차경이 '가지마오'부터 '놀보놈 거동봐라', 이영태가 '흥보 형수에게 뺨맞는 대목'부터 '떳다 보아라', 유수정이 '제비노정기'부터 '흥보 첫째 타는 대목' 그리고 안숙선 명창이 '흥보 둘째 박타는 대목'부터 마지막까지 마무리 지었다

이날의 주인공이 안숙선 명창인 만큼 앞선 제자들의 소리에는 좀 등한히 할 것도 같은데 객석의 청중들은 어쩜 그리도 흥보가 사설과 소리꾼들의 발림(몸동작)을 잘도 아는지 웃을 때 딱 맞춰 웃고, 추임새 넣을 때 고수만큼 정확한 박자로 "얼씨구"를 연발했다.

청중이 이 정도면 소리꾼은 죽을 힘을 다해 자신의 소리에 공력을 싣게 된다. 객석 온도보다 최소한 몇 도는 높을 무대 위지만 소리꾼들은 정말 혼신을 다한다는 말이 실감나게 해주었다. 그런 모습에 부채를 연신 부쳐 가면서도 청중은 뜨거운 열대야를 이기는 시원한 판소리 샤워를 만끽했다.

출연한 제자 중 맏이격인 유수정 명창
출연한 제자 중 맏이격인 유수정 명창 ⓒ 김기
게다가 이 날 고수는 현존 최고의 명고수 이인방으로 널리 알려진 정화영, 김청만 두 명고가 북을 잡았으니 이래저래 금상청화의 무대이자, 판소리 이벤트로는 최고의 구성이다.

판소리는 몰라도 안숙선은 안다는 말이 돌 정도로 안숙선 명창의 인기는 떨어질 줄 모르고 치솟는데, 마침내 제자들의 순서를 모두 마치고 하얀 모시한복을 아래위로 정갈하게 차려입고 무대에 오른 안 명창은 단가로 목을 가지런히 고르고 흥보가 나머지 부분을 이어갔다.

그러자 가뜩이나 뚝배기 모양인 하늘극장은 금새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언어로 그 열광의 분위기를 전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 너무도 한스러울 정도이고, 소리도 소리지만 판소리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밤참으로 뱃심이 든든해진 청중들을 열광케 한 남도민요 연곡. 남도민요에는 이 날 판소리를 한 제자들과 창극단 단원인 임향님, 서정금,박애리가 더 가세해서 무대를 풍성하게 해주었다.
밤참으로 뱃심이 든든해진 청중들을 열광케 한 남도민요 연곡. 남도민요에는 이 날 판소리를 한 제자들과 창극단 단원인 임향님, 서정금,박애리가 더 가세해서 무대를 풍성하게 해주었다. ⓒ 김기
안숙선 명창은 어릴 때 고향인 남원의 명창 강도근에게서 처음 소리를 배웠다. 그러나 오늘날의 안 명창이 있기 까지는 김소희 선생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볼 수 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고역대의 성음을 가지고 있어 듣는 이를 금새 장악하면서도 판소리 군데군데 박혀 있는 해학적인 대목에서는 남자 명창의 골계미와는 또 다른 섬세하면서도 적당히 질펀한 느낌을 주는 천변만화의 목을 가지고 있다. 그런 성음의 구사는 아무래도 대명창 김소희 선생 밑에서 제대로 소리길을 이어받았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안숙선 명창이 일단 판소리 흥보가 대목을 마친 시간이 밤 10시.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였다. 창극단은 늦은 시간임을 감안하고 동시에 과거 장터에서의 소리판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기 위해 국수와 파전 그리고 절대 빠질 수 없는 막걸리를 준비해서 출출한 청중들의 입맛을 돋우었다.

공연시작 직전 무대 바로 앞 멍석자리까지 가득 메운 청중들. 아래는 국수와 파전 등으로 밤참을 즐기는 청중들. 특히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이 적지 않게 보였는데, 어린이들 또한 판소리를 즐겁게 감상하는 모습들이었다.
공연시작 직전 무대 바로 앞 멍석자리까지 가득 메운 청중들. 아래는 국수와 파전 등으로 밤참을 즐기는 청중들. 특히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이 적지 않게 보였는데, 어린이들 또한 판소리를 즐겁게 감상하는 모습들이었다. ⓒ 김기
그리고 간단한 요기를 마치고 다시 객석을 가든 채운 청중들은 안숙선 명창을 비롯 국립창극단 단원들과 기악부 단원들이 마련한 남도민요 연곡에 빠져들었다. 요기를 해서 그런 건지 청중들의 박수와 환호소리는 전보다 훨씬 커졌고 비좁은 무대를 내려와 멍석 위에 도열해서 <육자배기> <삼산은 반락> <남한산성> <진도아리랑> 등 대표적인 남도민요에 흠뻑 빠져들었다.

역시 한국음악은 현장의 소리임에 분명했다. 오죽하면 판소리이겠는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남도의 흐벅진 정감이 묻어나는 남도민요를 모두 마친 시간이 밤 11시 40분. 이제 마치겠다는 최종민 교수의 마무리 멘트가 있었음에도 청중들은 아쉬워했고, 많은 사람들이 분장실로 찾아가 안숙선 명창 및 마음에 두었던 명창들에게 사인을 받느라 분주했다.

심야판소리 사상 최고의 관객이 모였다고 싱글벙글한 창극단 유영대 예술감독은 "바로 옆에 대박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와 오페라 <라 보엠>이 열리기 때문에 은근히 걱정했었는데 저곳에서는 이런 열기가 없을 거에요"하면서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다. 비단 자기 단체 공연의 성공만이 아니라 진정 판소리에 대한 대중의 사랑과 높은 수준에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찜통더위를 새삼 말해서 뭐할까. 객석은 온통 부채들이 밤나방처럼 펄럭거렸다. 영화관만 그러라는 법이 있겠는가. 소리판도 로맨틱한 데이트 장소.  사진 위 왼쪽은 유영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찜통더위를 새삼 말해서 뭐할까. 객석은 온통 부채들이 밤나방처럼 펄럭거렸다. 영화관만 그러라는 법이 있겠는가. 소리판도 로맨틱한 데이트 장소. 사진 위 왼쪽은 유영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 김기
심야판소리는 국립창극단의 작지만 정말로 중요한 프로그램이다. 사실 국악 특히 민속악에는 현재 극장 시스템이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그런 서양식 극장의 룰은 청중을 통제하고 또 억누르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유일하게 가수와 청중이 함께 입을 떼야 제대로 된 것이 되는 판소리는 룰보다는 흥과 신명이 먼저이다.

1년에 한번 야외극장인 하늘극장에서 열리는 심야판소리는 그런 원형의 맛을 즐기려는 진짜 알짜배기 판소리 귀명창들에게는 절대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혹자는 판소리가 죽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런 소리판을 본다면 저절로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다. 소리가 죽은 것이 아니라 소리판이 없는 것이다.

진정 판소리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심야판소리와 같은 판소리 원형의 질서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공연장과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소리판이 살면 청중은 타임머신 없이도 과거 조상들이 즐기던 그 한과 흥의 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것이 우리 음악의 힘이고 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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