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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올해 85세이신 배래선 할아버지는 여름 한 낮의 뜨거운 햇볕을 피하고도 싶었지만 뙤약볕이 내리쬐는 ‘무궁화당’ 가운데에서 아침 일찍 서둘러 아이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계셨다.

이윽고 아이들이 도착하자 배래선 할아버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시고 아힘나 평화학교 아이들을 반갑게 맞아주시며 환영사를 해주셨다.
“날씨도 더운데, 이 먼 곳에 있는 ‘무궁화당’을 찾아와서 참으로 고맙구먼. 에~ 이 무궁화 당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긴 인생을 살아오신 분들은 한 번 말문을 열면 좀처럼 끝이 나지 않기 때문에 할아버님께 양해를 구하고 아이들이 준비한 질문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 김종수
“할아버지께서 이 ‘무궁화당’을 세우는 일을 이끄셨다고 들었는데 이 ‘무궁화당’이란 어떤 곳인가요?”

“일제시대 강제로 이 곳 지꾸호 탄광에 끌려온 조선인들은 줄잡아 15만 명이 넘었어요. 조선인들은 일본 탄광주들의 가혹한 노동착취에 시달리다가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지. 난 그 희생자들을 탄광주가 나서서 초상 치러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어. 그래서 우리 동포들의 유골들은 여기저기 방치되었지.

오랜 세월이 지나 이제는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유골을 수집하여 납골당에 안치하고 추도하자'는 나의 제안에 뜻있는 우리 동포들이 돈을 내고 각 자치제의 협력을 얻어 이 곳에 2000년 12월에 이 ‘무궁화당’이라는 추도당을 건립하게 된 것이지.“

“할아버지 고향은 어디셨어요?”
“내 고향은 전라남도 보성.”

“보성에서 일본으로 언제 어떻게 오시게 되었나요?”

“어릴 적부터 집안 농사일을 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강제로 연행되어 현해탄을 건너 이 곳 지꾸호 탄광으로 와서 아주 위험하고 고된 탄광일을 하게 되었지.”

ⓒ 김종수
당시에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조선노동자들만 있었나요?”
“아니지. 일본 노동자들도 있었고, 다른 아시아 노동자들도 있었어요.”

“탄광에서 일본 노동자들과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은 똑같이 대우를 받았나요?”

“물론 아니지. 일본노동자들과 조선인들의 대우는 전혀 달랐어요. 탄광은 40미터 간격으로 세 층으로 나누어 굴이 있었는데, 조선에서 강제 징용되어 온 우리들은 탄광 맨 아래층에서 일했어. 너무 위험했고, 일도 제일 힘들었지. 앞도 잘 보이지 않았고, 얼마나 더웠는지...”

지꾸호 석탄박물관에서 보듯, 탄광 밖에서는 모두 기계화된 탄광인 듯 보이지만 할아버지의 증언처럼 탄광의 맨 아래층에서는 징용된 노동자들이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채탄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발파사고, 갱 천정이 무너지는 사고, 가스에 질식되는 사고 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강제 징용되어 끌려 온 조선인들은 가혹한 노동과 극심한 민족차별을 견디다 못해 50% 이상이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났고 그 탈출자들은 견딜 수 없는 폭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 김종수
“탄광노동자 출신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온 「신세타령(身世打鈴)」 속에는 당시의 상황들이 잘 담겨져 있다. 이 신세타령은 현재 지꾸호 지역의 배동록 할아버지로부터 전수되어 오고 있으며, 가락은 경상도 신세타령 그대로이다.


身世打鈴

우리의 고향은 경상북도인데~
나는야 어째서 숱(炭)파러 왔느냐

일본땅 좋다고~ 누가 말했느냐
일본 땅 와보니 배고파 못살겠네

숱(炭)을 팔 때는 배고파 죽겠는데
그말만 하면은 몽두리(몽둥이) 맞았네


“大日本帝国軍人ハ、戦地デ三日モ四日モ飯ヲ食ワント敵ト戦ットル!オマエタチハ三度三度、飯ヲ食ウジャロウガ!”

(“대일본제국군인은 전쟁터에서 3일이나 4일이나 밥도 안 먹으면서 적들과 싸우고 있다! 너희들은 3끼니 꼬박꼬박 밥을 먹고 있지 않느냐!”)

배가 고파요 어머니 보고 싶소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내었네

어머니 집에서 쌀가루 부쳐왔네
쌀가루 받아들고 눈물만 흘렸네

보따리 풀어서 쌀가루 집어먹고
눈물만 흘리면서 어머니 불러봤네

어머니 소리도 크게 못 부르고
감독님 겁이 나서 가만히 불러봤네

ⓒ 김종수

"点呼、点呼、点呼!"

"報告!サクラナラビ三号室、総員十名、南オロシ二人、北オロシ二人、左六カタ二人、坑外一人、ムコウカタ一人、公傷一人、私傷一人、異常ナシ、報告オワリ!"

"オイ、私傷者ハ誰カ、前ヘ出テコイ!キサマ、毎日叩カレニ仕事行クノガソンナニオモシロイノカ!ハヨ飯クウテ仕事イケ!仕事イカンヤッタラ事務所出テコイ!"

("점호, 점호, 점호!"

“보고! 사쿠라열 3호실, 총원10명, 남쪽 오로시 2명, 북쪽 오로시 2명, 왼쪽 육번 2명, 갱외 1명, 건너편 1명, 공상 1명, 사상 1명, 이상 없음, 보고 끝!」

“야, 사상자는 누구냐, 앞에 나와! 이놈아, 매일 얻어맞으러 일 나오는 게 그렇게 재미있냐! 빨리 밥 먹고 일하러 가! 일하러 안 가겠으면 사무실에 나와!”)

ⓒ 김종수
십오세 소년은 몸이 아파서
하루 놀라다가(놀려고 하다가) 뚜드려맞았네(두들겨 맞았네)

몽두리(몽둥이) 맞고서 굴안에 끌려와서
천장이 떨어져서 이세상 이별했네

죽은 아(아이) 꺼내서 손발을 만지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름만 불러봤네

감독놈은 몽두리 들고서
죽은 사람 옆에 두고 숱(炭)담아 내라했네

“大日本帝国軍人ハ、戦地デ自分ノ友達ガ死ンダラ、ソレニ隠レテ敵ト戦ッテイル!オマエタチハ一人死ンダトイッテ、ソレニタカッテ泣イテオッテ、戦争ガデキルカ!ケガシタ者ハミンナツレテアガッタンジャカラ、死ンダ者ハ仕事ガ終ワッテ炭函(ハコ)ヲ廻シテヤルカラ、ツレテアガレ、サキニ炭ヲ出セ!”

“대일본제국군인은 전쟁터에서 친구가 죽으면 거기에 숨으면서 적들과 싸우고 있다! 너희들은 한 사람 죽었다고 거기에 몰려 울고불고 해가지고, 전쟁을 할 수 있겠느냐! 부상당한 자는 모두 올려 보냈고, 죽은 자들은 일이 끝나면 하꼬를 내줄테니 데려 가거라, 먼저 숱을 파라! ”

이 말을 듣고서 복장을 뚜들면서(가슴을 치면서)
나라 뺏긴 민족은 요렇게 서름(설움)받나

몽두리 맞을 때는 같이 맞지하며
하꼬를 제쳐서 숱(炭)을 부어냈네

하꼬를 일받아서 죽은 사람 실어주고
눈물을 흘리면서 천장만 쳐다봤네

여기저기에서 죽은 사람은 많았는데
초상치는 것은 한 번도 못 봤네

ⓒ 김종수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사실 무궁화 당에 안치된 유골들은 그나마 다행이오. 하지만 지꾸호 지역에는 아직도 신원을 알 수 없는 조선인들의 유골들이 여기저기에 방치되어 있어요" 배래선 할아버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

배래선 할아버지는 얼마 전 ‘무궁화당’에 안치된 유골의 연고자를 찾아 그리운 고국의 가족에게 전해 주었다. 할아버지는 이 일을 큰 보람으로 여기셨다. 할아버지는 이 지꾸호의 어느 산 속에 혹은 남의 묘의 후미진 곳에 묻혀 방치된,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조선인들의 유골을 찾아, 그 신원을 밝혀내고 유골이나마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며 여생을 보내시겠다고 하셨다.

강제징용 조선인들로부터 구전되어 오는 이 신세타령은 배동록 할아버지를 통해 오늘도 일본학교 교육현장에 전해지고 있다. 지꾸호에 묻힌 강제징용 조선인들의 맺힌 恨의 소리를 담은 아힘나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돌아왔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재일코리안의 삶을 통해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얼을 찾아나선 아힘나 평화학교(031-674-9130) 아이들의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을 기록한 세번 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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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 관장 천안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 공동대표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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