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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부근에 가까워 질수록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점점 많아졌다. 개구리 닮은 바위 앞에서.
정상부근에 가까워 질수록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점점 많아졌다. 개구리 닮은 바위 앞에서. ⓒ 김선호
지금 와서 돌아보면 ’고생‘했던 만큼의 보람과 추억이 아로새겨지는 것이 여행이라는 생각이다. 이번 휴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제일 고생스럽게 강행했던 ’천관산 등정기‘이다. 산을 오르는 일을 들어 '산행'이라는 단어로 즐겨 썼지만, 이번 천관산은 산행이라고 하기엔 조금 처절한(?) ‘등정’이라는 말이 더 적절한 표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천관산 입구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한 됫박쯤 되는 땀을 흘렸고 반쯤은 지쳐 있었다. 뙤약볕이 사정없이 내리꽂히는 등산로 입구로 발을 내딛기조차 힘겨울 정도로 더운 날이었다. 여름휴가 기간이 아니면 장흥까지 내려올 일이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면서 천관산을 오를 이유가 있을까 회의가 들었다. 순전히 더위 때문이었다. 천관산을 등반하자는 남편의 제안에 동의를 하긴 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아 보였다.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쭈쭈바를 입에 문 아이들의 얼굴도 벌써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가는데까지는 가보자”고 뒤쳐지는 아이들을 달래 저 만큼 앞서가는 남편의 뒤를 따른다.

매표소에서부터 중부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삼나무들이 눈에 띈다. 등산로 양옆에서 가로수 역할을 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등산로 입구 쪽 숲은 온통 삼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다. 침엽수는 사람에게 이로운 물질인 피톤치드를 뿜어내는데, 그걸 가장 많이 품은 게 삼나무와 편백나무라고 알려졌다. 침엽수라고는 잣나무와 소나무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내게 천관산 입구의 삼나무 숲은 매우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신비경을 연출하는 천관산의 기암괴석들
신비경을 연출하는 천관산의 기암괴석들 ⓒ 김선호
삼나무에게서 힘을 얻는다. 여전히 뙤약볕은 거머리처럼 따라오지만 장안사 입구에서 약수 한 사발 들이켜고 내쳐 동백숲으로 이어진 숲길로 들어섰다. 동백숲은 울창한데 등산로가 꽤나 넓으니 여전히 따가운 햇살을 피할 도리가 없다. 1킬로 정도를 걸었을까. 이쯤에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조금만 더 올라가 보기로 한다. 갈림길이 나오고 애초에 계획한 대로 환희대 쪽으로 방향을 잡으니 비로소 호젓한 숲길이 시작된다.

산모퉁이를 돌아가니 다도해가 환하게

터널을 만든 나무그늘 아래에 들어서니 포기하려던 마음도 수굿해지고 걸음이 조금씩 빨라진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무슨 얘긴가를 나누며 더위도 아랑곳 하지 않는 모습이다. 일상에서는 지지고 볶으며 나를 잔소리꾼으로 만드는 아이들이 숲에선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남부지방의 다른 식생 탓인가. 침엽수림이 많은 탓인가. 어인 일인지 계곡이 메말라있다. 이렇게 더운 날은 계곡물 흐르는 소리만으로 얼마나 시원한 느낌을 받았던가. 말라버린 계곡물을 보니 더욱 더운 느낌이 드는데 길은 이제 활처럼 휘어지며 동쪽사면을 돌아간다. 제법 시원한 바람도 불어오니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인가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 산길이다. 그늘진 동쪽 사면이 끝나고 쫄쫄 흐르는 계곡을 건너니 본격적으로 된비알이 시작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숲은 관목들만 무성해 산 속으로 사정없이 땡볕이 쏟아져 내린다.

두 사람이 앉아있기 딱 좋은 크기인 금강굴은 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늘한 바람을 내뿜었다.
두 사람이 앉아있기 딱 좋은 크기인 금강굴은 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늘한 바람을 내뿜었다. ⓒ 김선호
계속 가야 하는가 싶어지는데 산모퉁이를 돌아가니 시야가 환하게 트인다. 다도해가 환하게 드러난다. 서해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다도해가 마치 구름 속에 잠긴 산봉우리가 같다. 다도해를 관망할 수 있는 특별한 조망권이 그곳에서부터 산길을 돌아갈 때마다 더 시원하게 더 원대하게 펼쳐진다. 그러니 숲길 중간 중간에 뙤약볕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 살갗이 탈 것 같은 고통도 금세 잊혀지곤 한다.

게다가 7부 능선 즈음을 오르니 비로소 천관산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는 바위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천관이라는 이름도 산 중턱에서부터 정상에 이르기까지 기묘하게 산을 장식한 바위들이 있어 나온 이름이다. 천관산 정상부근 바위들의 모습이 ‘주옥으로 장식된 천자의 면류관 같다’하여 천관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조금씩 바위산의 위용이 드러날 때마다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장군검’, ‘노승바위’ ‘할미바위’ ‘양근암’ 그리고 이름을 얻지 못했으나 기묘한 형상으로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바위들이 한결같이 크고 장대하여 놀랍다. 비로소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그곳까지 오른 일이 얼마나 잘 한 일인가 싶어진다.

억새밭의 아름다움에 함성이 절로

금강굴이라는 이름의 바위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신기하게도 굴속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인데 천연에어컨이 따로 없다며 아이들이 나올 생각을 안 한다. 금강굴에서 쏟아져 나오는 서늘한 바람에 몸을 식히고 환희대로 향한다.

이젠 눈을 들면 어디든지 거기가 가장 좋은 조망권이 확보되는 지점이 될 정도로 다도해를 품은 서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조망이 시원하다.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기묘한 바위모양의 형상들은 더 자주 나타나고 주변능선은 그 바위들과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가 따로 없다. 그 장엄한 풍광을 세치 혀로는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어 ‘내로라하는 유명한 산들이 천관산 앞에선 무릎을 꿇을 거라고’ 감히 장담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천관산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억새밭 풍경이 넓게 펼쳐진 정상에 섰을 땐 “와아!” 하는 함성이 절로 나왔다. 그곳이 환희대다. 진짜 정상은 저 억새밭을 가로질러 희미하게 보이는 연대봉이니 아직은 여정이 조금 더 남아 있다. 그러나 환희대에서 환호성이 나오는 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만 권의 책을 쌓아 놓으면 그런 모양이 나올까? 누군가 절묘하게 바위를 깎았대도 그리 자연스럽고 반듯한 네모난 형상이 나오지 못할 거였다. 땡볕아래 놓인 환희대에서 아이들은 숨바꼭질에 여념이 없다. 역시 아이들이다.

가을 억새만 아름다울까? 여름 천관산 정상능선의 억새군락지는 아름다웠다.
가을 억새만 아름다울까? 여름 천관산 정상능선의 억새군락지는 아름다웠다. ⓒ 김선호
가을 억새도 감동을 불러일으키겠지만 푸르게 펼쳐진 한여름의 억새밭은 또 그 나름대로 멋스러움이 있었다. 푸른 물결을 헤치듯 억새밭을 건넜다. 그늘 한점 없는 억새밭을 지나려는데 천관산을 등정하는 오직 한 가족인 우리를 어여삐 여기셨을까. 마침 하늘에 뭉게구름이 크게 걸렸다. 그 구름이 그늘을 만들어 주어 노래를 부르는 여유까지 부리며 억새밭을 건넜다. 그 속에 감로천이 숨겨져 있었다.

억새밭 중간 즈음에서 샛길로 약 100여 미터 내려가면 거짓말처럼 달고 시원한 물이 퐁퐁 솟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감로천’의 약수를 받아 마시고 물을 보충했다. 마셔도 마셔도 질리지 않은, 지금까지 마셔 본 가장 맛난 약수였다. 이젠 정상석이 있는 연대봉으로 향한다.

예전에 봉화를 올렸다는 연대봉에 올라 보니 다도해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펼쳐졌다. “바다위에 떠있는 섬들이 귀엽구나” 아이들의 표현이 그랬다. 동동, 떠있는 저 작은 섬 한개만 건져 볼까, 너희들 마음에 한 개씩만 건져서 담아가보렴. 천관산에 왜 다녀왔니, 그러면 그 섬 한개 꺼내 보여주게 말이야.

포기할까 싶은 마음을 다잡으며 올라오길 참 잘했다. 산 정상에서 바라본 바다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줄 미처 몰랐다. 천자의 면류관을 쓰고 그 바다를 내려다보는 천관산 정상이 그렇게 당당하게 서 있을 줄 그 산을 오르지 않았다면 결코 알지 못했으리라.
천관산 정상에서 손에 잡힐듯 바라다 보이는 다도해 정경.
천관산 정상에서 손에 잡힐듯 바라다 보이는 다도해 정경.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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