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그러니까 정확히 2004년 10월쯤이다. 그때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독립하기 위해(경제적으로) 청주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공주에서 인력사무소에 나갔다.
새벽 6시까지 인력사무소에 나가 사람의 힘(인력)이 필요한 곳으로 일하러 갔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치 않고 힘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했다. 하루 일당을 쓸 사람들은 그 전날 인력사무소에 연락해 내일 몇명이 필요하니 준비해달라고 전화로 예약한다.
2004년 10월 어느 날, 나는 공주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30분 만에 시골에 있는 하루 일터에 도착했다. 그날 나는 '하루노동 일터'에서 서러움을 많이 받았다.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일이 서툴다며 구박했다.
나는 그날 저녁, 기차를 타고 내 마음속의 '낙원'을 찾아 길을 나섰다. <녹색평론>에서 보았던 어떤 귀농인의 글이 마음에 오래 남아 있었다. 그 분은, 자식이 그 또래 친구들처럼 도시에 나가 돈 벌지 않고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는 아버지와 어느 날 크게 다툰 후, 부산에 나와 날품팔이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잡지에서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풀무원공동체'의 소식을 접했다. 그곳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 사는 곳이었다. 그분은 거기서 결혼도 하고 5년 동안 농사일을 배워 현재는 다른 곳에서 농부로 살고 있다.
나는 날이 저문 뒤에야 기차에서 내렸다. 버스도 타고 걸어서 찾아갔다. 하지만 거기서 만난 사람의 얘기로는 충북 음성으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나는 그날 새벽에 공원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서울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다시 공주로 돌아왔다.
2003년 <녹색평론>을 접해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돈이 필요 없고 모두가 인디언들처럼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꿈꾼다. 지난 3월 8일, 내가 대추리에 가기 전까지 세상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방황하며 '풀무원공동체'를 마음 속으로만 그렸다.
대추리에 들어가서 처음 며칠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대추리에서 몇일을 지내보니 완벽히 내가 꿈꾸던 곳은 아니지만 그것에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일단 돈이 중요치 않았다. 미군기지 확장 반대의 구호 아래 똘똘 뭉쳐서 더욱 그런 지도 모른다.
돈보다는 사람이, 우정이, 사랑이, 이웃이 중요했다. 또한 농사 지으며 술 마시고 저녁에 촛불행사에서 같이 노래 부르고, 좋은 이야기도 듣고…. 그야말로 '좋았다'. 대추리에서 두 달 사는 동안 정말 행복했다.
하지만 지난 5월 4일 학교가 무너지고 그 이튿날 저녁에 황새울 들판에서 나는 '군사시설 보호구역'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수원에서 갇혀 있는 날이 대추리에서 살았던 날보다 많아졌을 때 서글펐다. 같이 노래 부르고, 일하고, 얘기 나누고 싶었는데….
대추리, 도두리, 함정리 등의 마을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효율' '경제성' '힘 쌓기'가 아니라 '지속가능' '인간성' '힘 나누어 갖기'다. 이달 말에 빈집 철거 즉 마을 파괴가 있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대추리에서 만난 형과 나눈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우린 져도 이기는 거고, 이겨도 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