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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다. 이름은 김선웅. 초등학교 2학년이고 나처럼 안경을 썼다. 몸은 비쩍 마른 편이고 수학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하고 슬기로운 생활을 제일 못한다. 여름방학 전 시험을 본 모양이다.
빨간 색연필로 점수가 매겨진 시험지들을 통째로 들고 왔는데 일단 점수 이야기는 빼자. 그 중 우리부부를 포복절도케 한 아이의 답변이 있었다. '이웃을 조사하기 위해 이웃을 방문하는 시간으로 알맞은 때는 언제입니까?'라는 오지선다형 질문에 아이가 한 대답이었다. 확률은 1/5이었지만 아이의 대답은 '내가 한가한 시간'이었다. 이 문제의 정답은 '미리 약속한 시간'이었다.
'슬기로운 생활'이란 과목이었는데 이 과목에 대한 아이의 점수는 60점이었다. 그렇다고 난 우리 아이가 60점만큼만 슬기롭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음을 물론이다.
어찌됐든 이 아이는 나에게 귀농을 생각하게 했던 원인제공자이고 부재 시 유일하게 나를 초조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다.
나에겐 너무 특별한 존재인 '아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다 그렇겠지만 아이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다. 특히 아들이어서가 아니라는 걸 강조해주고 싶다. 아내보다 먼저 병원 분만실을 나서는 간호사의 품에 안긴 딸을 보고 싶어 했던 게 나의 진심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다섯 형제들 중 넷째로 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만약 당신이 남자라면 줄줄이 아들만 있는 집에서 한 달만 살아보길 권한다. 그럼 아마도 여자가 얼마나 귀한 존재란 것을 절감하며 여자 보기를 전대미문의 보물 다루듯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여자가 아닌 아들을 싫어하진 않는다. 그것은 모든 부모들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자식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두 가지 중 하나다. 남은 하나가 무엇인지는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말하진 않겠지만 공교롭게도 그 하나에 해당되는 사람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것은 결혼한 지 한 3년쯤 지난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하여튼 굳이 나이로 따지자면 나보다 서른 두해 먼저 귀농한 셈이 되어버린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이젠 시골아이가 된 내 자식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의 주제다.
아이는 귀농의 첫 번째 원인제공자
내가 처음 귀농을 생각하게 된 것은 아이의 교육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삶의 변화란 것은 때론 생각지 못한 이유들로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아이가 이제 막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시점이었다. 나는 그 전부터 아이에게 내가 받아왔던 오로지 공부로만 아이의 모든 것이 평가되어지는 교육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았었다.
무시로 벌어지는 언어와 물리적인 폭력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하고 싶었고 숙제라는 미명하에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들을 조금씩 비틀어서 매일 써야 하는 일기라는 것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릇 무엇이든 그 일이 합리적이고 보편타당한 성질을 갖고 있다는 전제하에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과 후환이 두려워하는 일의 차이는 엄청난 질의 차이를 동반하게 되어 있다.
단적으로 일기란 것을 예를 들었지만 일기를 쓰면 좋다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좋은 일기조차도 쓰는 사람보다는 쓰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다. 그렇다고 일기를 쓰지 않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럼 세상에는 정말 나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아질 뿐이다. 그것은 취사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나쁘지 않게 세상을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귀농을 하고 초등대안학교가 아직 없는 이곳에서 달리 선택의 여지없이 아이는 부근 초등학교로 전학을 해야 했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제도인 우리나라는 이사를 하게 되면 의무적으로 다녀야 할 학교가 지정이 되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나와는 일주일 시차를 두고 먼저 내려간 아내가 아이와 전학을 위해 학교를 방문한 날 서울에서 전학 온 아이와 젊은 엄마를 학교 아이들이나 선생님들이나 시골에서 서울로 전학 온 아이보다 더 신기해 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마을을 돌아 돌아가는 스쿨버스...
무엇을 먹고 살라고 여기를 내려왔냐는 노골적인 질문부터 무슨 곡절로 이 궁벽한 시골생활을 시작했는지 의아해 하는 눈빛까지… 눈과 입으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나 보다. 내가 시골로 내려와 처음 아이학교에 갔던 날,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내게 던진 첫 질문이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였던 걸 보면 꽤나 새로운 사람들에 대한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는 게 시골인심인 듯도 싶었다.
학교는 과연 시골학교답게 고즈넉했고 한 학년에 한 반 정도 그나마도 한 반 아이들이 열 명을 넘지 않는 수준이었다. 신사임당과 이순신 장군 동상을 기준으로 옛날 나 어릴 적 학교건물을 그대로 빼어 박은 듯한 정경이 잠시 나를 유년시절 회상에 젖게 만들만큼 다정하긴 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대중교통이 부재한 시골학교는 학교버스가 있어 원거리 아이들을 직접 태워 가고 오는데 학교에 버스가 한 대(33인승)밖에 없어 학교를 중심으로 모든 마을들을 아침저녁으로 전부 돌아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 마을은 기존 마을에서도 2km는 더 뒤로 물러나 있는 마을이다. 만약 학교버스가 우리 아이를 태우러 2km를 올라오게 되면 전교생이 각자의 위치에서 승차시간을 10분씩 앞당겨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난감했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킬 수밖에.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기존 등하교 시간이란 것도 스쿨버스 한 대로 마을들을 도는 시간 때문에 아이가 등교버스를 타야 하는 시간은 7시 20분이다. 집에서는 6시 30분부터 일어나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돌아오는 시간은 같은 건물을 쓰는 중학교 분교 학생들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오후 4시 출발하며 50분 뒤에야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차로는 불과 15분 거리인데도 말이다. 아직 채 여물지도 못한 아이에게 새벽 산길을 걸어 내려가 초저녁 산길을 되짚어 오게 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었다. 차를 태워 오고갈 밖에.
도시와 마찬가지로 '사교육'이 난립하고
이건 9살짜리 초등학생에겐 너무 가혹한 등하굣길이었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너무 오랜 시간을 학교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모든 학생들을 한 버스에 태워 모든 마을을 돌고 돌아 등교를 하고 하교를 하는 것은 아무리 부족한 예산을 십분 감안한다 해도 좀 지나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오후 1시쯤 모든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개울가로 몰려다니며 버스 출발시간을 기다린다면 몰라도, 이곳 시골이라고 학원이라는 사교육의 총아들이 손을 뻗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수업을 마치는 시간에 맞추어 한적한 학교주차장엔 OO수학학원 OO영어학원 OO태권도학원 OO미술학원 등 서울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었던 봉고차들이 분주하게 오고 갔다. 아울러 농사일에 바쁜 이곳 젊은 부부들 역시 따로 아이들 돌보는 일을 학원에 맡길 수밖에 없는 형편이기도 했다. 아이는 내가 아이의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데리러 오길 언제나 원했다. 이래저래 아이가 또래 친구들과 교감을 나누는 시간은 학교 수업시간 말고는 없는 것이다.
다만, 분주하게 교실을 드나드는 학부모들이 없다는 것과 거의 한 달에 한 번 정도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아이생일잔치에 초대한다는 문자메시지가 없다는 것은 서울과 사뭇 다른 좋은 점이긴 했다. 그렇지만 내가 애초에 생각했던 시골학교 생활과는 많이 어긋나 있는 게 사실이었다. 모든 학생들이 매일 일기를 써야 한다는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좋은 교육여건 마련해 주려던 계획에 위기가...
많은 학생들을 한꺼번에 교육하다보면 불가피하게 개인적인 취향이나 조건들이 고려되기가 어렵다는 것은 충분히 알만한 일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교육이란 것은 채 청산되지 못한 일제 강점기 시대의 친일세력들이 교육 권력에 그대로 남아 한동안 군국주의 시대의 교육방식들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발전시켰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말이다(결코 심한 비약은 아니다).
여러 가지 귀농이유들 중 아이를 위해 좋은 교육여건을 마련해 주려 시도했던 핵심적인 사항이 지금 위기를 맞고 있다. 방학이 지나고 나면 학교를 방문해서 나의 이런 고충들을 해결할 방편을 상의해 볼 생각이다. 그렇지만 이런 나의 고충들이 다른 학부모들에게는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무심한 일상들이라면 순전히 나만의 특별한 고충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하는 주저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여러 가지로 불편한 사안들이 다른 부모들에게는 능히 여러 가지로 편안하게 해주는 사안일 경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지금 목하 고민 중이다.
'보내느냐? 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