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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죽음은 슬프다. 더구나 그 죽음 뒤에 남다른 사연이 숨어있다면 슬픔은 배가 되기 마련이다. 내겐 청구성심병원 노동조합의 이정미 전 위원장의 죽음이 그렇다. 그녀는 19일 새벽 3시 20분, 40세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했다.

이정미 위원장(위원장을 그만둔지 좀 됐지만, 그냥 위원장으로 부르겠다)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999년 여름이었다.

IMF 구제금융 후 중소규모 사업장에서 부당노동 행위가 극성을 부리던 시절, 대표적인 장기투쟁 사업장이던 청구성심병원의 노조는 사측의 해고와 부당노동행위에 맞서 오래도록 싸웠다.

1998년 청구성심병원에서는 사측이 고용한 용역깡패가 조합원 총회에 투입되어, 술이 취한 상태에서 식칼을 휘두르며 총회장의 불을 끄고 똥물까지 투척하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이 장면이 9시 뉴스에 방영돼 청구성심병원은 부당노동행위 사업장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담대하고 꼼꼼했던 사람, 그녀의 통곡

▲ 청구성심병원 노조의 이정미 전 위원장은 19일 새벽 3시 20분 운명을 달리했다.
ⓒ 이정미 후원회
1999년 여름, 청구성심병원에서는 1998년의 대량해고에 맞선 복직투쟁과 복직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던 부당노동행위에 맞선 싸움이 진행됐다. 조합원들의 흔들림 없는 활동은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 투쟁에 함께 하도록 만들었다.

당시 지역의 노동조합과 사회단체 등이 모여서 '청구성심병원 부당노동행위 근절과 김학중 이사장 처벌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나도 공동대책위원회의 일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정미 위원장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학생운동을 마치고 사회운동을 본격적으로 고민하던 내게 청구성심병원 노조원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특히 병원의 비상식적인 탄압 때문에 개인적인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며 투쟁해야 했던 이정미 위원장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녀는 담대했고, 동료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하루는 웃으며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어제는 (병원 측에서) 협박전화가 와서, 남편이 이대로는 불안해서 안 되겠다며 내게 가스총을 사줬어요."

그녀는 그만큼 절박했고, 고통 속에 있었다.

우리는 지역공동대책위를 구성해서 청구성심병원의 부당노동행위를 은평구민들에게 알렸다. 매주 연신내 지하철역으로 나가서 가판을 설치하고 유인물을 나눠주고 시민들의 혈압과 혈당을 검사해주며 병원의 부당함을 선전했다. 그렇게 한 달. 드디어 병원은 백기를 들었다. 새벽에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온 이사장은 단체협약을 맺자고 했다.

그날 새벽 조합원들은 노조 사무실에 초조한 마음으로 모였다. 병원 이사장은 분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정미 위원장은 끝까지 담담한 표정으로 단체협약 문구를 꼼꼼히 검토했다.

단체협약에 도장을 찍고 조합원과의 뒤풀이에 온 이정미 위원장은 통곡했다. 단 순간도 자신의 어려움을 표현하지 않았던 그녀가 "너무 힘들었다"고 울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힘들다고 하기보다 옆에 있는 사람들을 다독이며 가야 할 길을 묵묵하게 걸었던.

반백의 할머니가 된 그녀를 보고 싶었지만…

그런 그녀가 보건의료노조의 부위원장에 당선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연락도 못 드렸는데 비쩍 마른 얼굴로 우리 결혼식에 찾아온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후 위암이 발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첫 발병 후 위를 절제하고 쉬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여전히 당당했고 "어서 병이 나은 뒤 현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2005년 12월. 암이 복벽으로 전이되어,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차마 그녀를 만나러 갈 수 없었다.

이정미 위원장과 함께 활동했던 노조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서 치료비를 모으기 시작했다. 난 올해 1월 후원회의 존재를 알게 됐다.

후원회 일을 돕고 싶었다. 그녀를 일찍 찾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바른 운동가의 모습으로 기억되었던 그녀를 보내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녀가 투쟁에서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지만 동지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던 사람인 것을 알고 있다. 보건의료노조의 부위원장으로 당선돼 전국의 중소병원 사업장을 찾아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싸웠던 그녀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은 기억한다.

지난 3월 31일 '이정미 후원의 밤'에 참석한 그녀는 많은 동지들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꼭 살아서, 훌륭한 활동가로 살면서 이 고마움을 꼭 갚겠다."

그런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났다. 이정미 위원장이 반백의 할머니가 되는 것을 꼭 보고 싶었던 동지들은 한없이 울었다.

함께 잘 사는 세상 만들어보겠다며 온 몸을 바쳤던, 약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운동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줬던 그녀를 많은 사람들은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언제나 주변 사람들에게 힘이 됐던 '아름다운 사람' 이정미 위원장! 부디 좋은 세상에서 편히 쉬세요."

덧붙이는 글 | 이정미 위원장의 발인은 8월 22일(화요일) 오전 8시 서울대병원 영안실에서 진행되며, 영결식은 같은 날 오전 11시 30분 마석모란공원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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