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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 여행 다녀와서 패닉 상태가 되었다. 집에서 누워 뒹굴뒹굴거리다가 학원 같이 다니는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프다고 했던 친구가 걱정이 되어 '괜찮아?' 하고 보냈더니 몇 분 후 답장이 왔다.
'남자친구 휴가나와서 원기 회복했다 ㅋㅋ 다 나았어.'
아주 염장을 지르는구만! 일년째 남자친구 없이 외로운 솔로 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나는 이제 별 거 아닌 문자에도 샘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좋겠다. 난 방바닥 긁고 있어'하고 보냈더니 또 답이 왔다.
'괜찮은 사람 있는데 지금 중국에 있어. 추석쯤에 한국 오니까 소개팅 시켜줄게.' 헉! 듣던 중 반가운 얘기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래'하고 답문을 보냈지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소개팅! 이 얼마나 정겨운 단어인가? 후훗.
가까운 친구들조차 나더러 눈이 높다면서 소개팅시켜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높다기 보다는 기준이 특이할 뿐인데.' 아무튼 나는 핸드폰을 열어 추석이 언제쯤인지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는 지난 추억속으로 살금살금 걸어들어갔다.
내가 머리털 나고 처음 소개팅을 했던 때는 방년 17세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남자친구 사귀어 보겠다고 소개팅에 나갔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까마득히 어린 날의 기억같지만(벌써 6년 전이구나) 그 때는 나름대로 내가 다 큰 줄로만 알았다. 학교 친구의 주선으로 소개팅을 하게 된 일요일. 나는 옷장에서 제일 어른스러워 보이는 야시시한 핑크색 티셔츠를 꺼내입고, 머리를 한 삼십번쯤 빗은 후에 집을 나섰다.
그 당시 나름대로 잘나가던 날라리였던 친구는, 주선자의 본분(!)도 망각한 채 나보다 더 예쁘게 하고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안양 일번가 입구에서 만나 상대 남자가 기다리고 있는 커피숍으로 향했다. 친구는 남자와 잠깐동안 얘기를 나누더니만, 오분도 안되어 자기 남친을 만나러 갔다.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왜냐구? 언어와 실제 비쥬얼 사이의 괴리감을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친구가 인기 짱에 한재석을 닮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얘기하던 남자는(잘 생기기는 했지만)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외모 뿐 아니라 말투라던가, 둘 사이를 흐르던 어색한 기류가 그랬다. 아무리 처음 만났다고 해도 이렇게 불편하고 재미없을 줄이야.
우리는 키위쥬스랑 오렌지쥬스(였을 거다)를 시켜놓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밥을 안 먹어서 배가 고팠었다. 하지만 어색한 상태에서 밥을 먹으러 가자고 얘기할 수도 없었고 해서 그냥 열심히 쥬스를 마시면서 그쪽 얘기를 들었다. 처음이라 공통적으로 할 얘기가 거의 없어서 그냥 학교 얘기하고, 주선자였던 친구 얘기하고, 연예인 얘기하고, 정말 쓸데 없는 얘기만 두시간 정도 했다.
그러다가 그쪽에서 물었다(당시 최고 인기 드라마는 '이브의 모든것'이었다).
"'이브의 모든 것' 에서 장동건이 멋있어요? 한재석이 멋있어요?"
나는 별 생각 없이 "장동건이요" 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쪽 남자분이 침을 튀겨가며 한재석이 더 멋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한재석은 가난한데도 김소연을 좋아해서 희생하고 어쩌고 저쩌고…."
갑자기 눈꼽만큼 있던 호감까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서 몇 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그 후에 몇 번 문자메시지가 오기는 했지만 나는 그 사람을 그닥 다시 보고싶지 않았다. 뭐, 그 쪽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주선자인 친구와도 몇 달 후 멀어져서 그냥 그렇게 나의 첫 소개팅은 별거 아닌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5년이 흘렀다.
아는 언니 대신 소개팅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남자친구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남자친구와 오늘 내일 하던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양다리 걸치면서까지 소개팅 대타를 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거니와, 그 날의 컨디션도 별로였던터라 '얼른 차 한잔만 마시고 일어나야지' 생각하고 나갔다. 그런데…그랬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나게 된 것이다.
짧은 머리에 운동선수 체격, 과묵하지만 위트있는 성격의 그는 그야말로 킹카였다. 어찌나 잘생겼는지 주체못할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얼굴만 보고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너무도 멋진 남자가 눈을 똑바로 보고 말을 걸어오는데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맘속으로 소개팅을 펑크냈던 언니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후후.
그렇게 그 사람과 알게 된 후 같이 밥도 먹고 치킨도 먹고, 영화도 보고, 드라이브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남자친구 사귈 때 외모는 절대 안본다고 나름대로 자부하며 살아왔건만, 나 역시 속물임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사람 마음이 그리 투명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4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그 동안 나는 이전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이 사람과도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진심으로 교감하지 않으니 자꾸만 틈이 생겼고, 노력으로 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 틈은 노력할수록 벌어졌다. 4개월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동안, 나는 내 감정이 진짜 사랑인지 단순한 호감인지 헷갈려하며 답답해했던 것 같다. 헤어진 이유에는 글로 쓰기 힘들만큼 힘든 여러 요소들이 있었지만, 어쨌던 외모만 보고 좋아했던 내 탓이 제일 크지 않았을까.
여태껏 이렇게 두 번 소개팅을 해봤고,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 때문에 그 이후에 들어온 소개팅 제의도 늘상 거절만 했다. 하지만 솔로생활을 1년 넘게 했더니 그저 그랬던 소개팅 제의가 반갑게만 들려온다.
사람 일이란 게, 인연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뭐 만날 사람은 만나지 않을까? 편하게 생각하고 조바심 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어쨌든간 23살의 크리스마스는 솔로로 보내고 싶지 않기에, 나는 추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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