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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년 각도별 의병 전투 횟수 및 의병 수.
ⓒ 최장문
1894년부터 시작된 한말 항일 의병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일어났지만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일어나고, 규모면에서 가장 크게 봉기하고, 가장 오랫동안 전개된 곳은 강원도였다.

다른 지역보다 강원도에서 의병이 활발했던 이유는 의병의 사상적 기반이 된 위정척사사상의 중심학자인 이항로를 계승한 유인석의 문인들이 초기 의병전쟁의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무장과 훈련이 부족한 상태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던 의병은 산악지대를 이용한 유격활동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고, 그런 면에서 강원도가 유용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의병장, 민긍호

강원도 의병 중 가장 큰 활약을 보인 사람은 단연 민긍호다. 그는 서울 출생으로 1897년 군인이 되어 춘천, 고성에서 근무하다 원주 진위대(중앙군은 친위대, 지방군은 진위대)로 전입했다. 원주 진위대는 지방에 있던 8개 진위대 중 하나로 전체 병력은 600명 정도였다.

1907년 8월 1일, 서울 친위대 해산 소식이 원주 진위대에 전해지면서 병사들은 동요했다. 이에 당시 특무정교(부사관의 원사에 해당) 민긍호는 원주읍 장날인 8월 5일 봉기를 선언한 후 장터에 모인 읍민들을 모아 무기고를 열고, 무기(약 1600정의 총)와 탄약(약 4만발)을 분배하여 대오를 정비하였다.

민긍호 의병부대는 1907년 8월 초순부터 이미 원주, 횡성을 중심으로 여주, 충주, 죽산, 춘천, 강릉을 연결하는 중부지방에서 활동했는데, 민긍호 부대의 활동은 전국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의병부대는 규모가 가장 컸을 때 약 2000명에 달해 단위부대로는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컸을 뿐 아니라, 해산군인과 포수가 주축을 이뤘기 때문에 전투력과 기동력이 실로 막강했다.

민긍호는 이 병력을 다수의 소부대로 분산해서 그 지역 농민과 결합하게 하여 유격전을 전개하며, 7개월 동안 무려 70여회에 이르는 전투를 벌였다.

당시 지식인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강원도에 의병이 불길처럼 일어 군수가 달아나 관청을 비운 곳이 19군에 이른다"고 말했다. 민긍호를 중심으로 한 강원도 의병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는 증거다.

▲ 묘에서 바라본 원주 시내는 답답하기만 하다. 아파트 건설 후 아파트가 도시의 시야를 막았기 때문이다. 안내를 맡은 삼척중학교의 이경훈 선생님은 성장과 개발도 중요하지만 환경과 조경, 인간 생활의 조화도 중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 최장문

역사의 기막힌 대조법, 민긍호 묘와 정일권 기념탑

▲ 탑에는 "순국 (중략) 애국정신을 선양하던 중 (중략) 반세기를 지난 오늘날에 있어서 멸공전에 혈전투전하는 우리의 참다운 귀감으로서 그 지성과 애국정신은 영원히 대한청년의 흉금에 계승되어 그 빛을 더하리라. 1954년 육군참모총장 육군대장 정일권."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친일과 항일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새로운' 역사에 울화가 치밀었다.
ⓒ 최장문
민긍호는 1908년 2월 강원도 박달치(횡성군 강림면)에서 일본군의 기습작전에 말려 전사했다. 1954년에 묘를 지금 자리(원주시 봉산동)로 이전했다고 한다.

그런데 묘소 앞에 이상하게 생긴 조형물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일제 만주국 군관학교 출신인 정일권의 기념탑이었다.

정일권이 누구인가?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는 일제 만주군 헌병 대위였다. 이후 일본군 출신을 신생 한국군의 주축으로 중용한 이승만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해 참모총장까지 지냈다. 6·25중에는 박정희의 현역 복귀 결정권자가 되어 흔쾌히 서명함으로써, 한국군 내 남로당 조직의 주요 인물이던 박정희의 은인이 됐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엔 국무총리 6년 7개월, 국회의장 6년을 역임하며 독재정권을 유지한 핵심 인물이기도 했다.

한 사람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죽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일제 침략의 앞잡이가 되어 독립투사들을 죽이려 다녔건만, 어찌 한곳에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걸은 것처럼 포장되어 있는가! 기막힌 역사의 대조법이 여기에도 통하고 있었다. 심한 갈증을 느낀다.

묘지를 내려오는 길에, 정일권 기념탑의 존립 여부에 대해 선생님들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민긍호 의병장을 죽어서도 감시하는 일본 장교 정일권의 탑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생님들과, 그대로 보존해 정치권력을 휘두른 사람들이 역사를 어떻게 악용했는지 교육하는 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생님들의 논쟁이었다.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논쟁은 끝이 났지만, 마음의 씁쓰름함과 답답한 갈증은 여전히 남는다.

▲ 민긍호 의병장 묘 앞에 세워진 기념탑.
ⓒ 최장문

덧붙이는 글 | 정일권에 관한 이야기는 인터넷 네이버 블로그 <역사 속으로>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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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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