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 사거리를 지나기 전 우리은행 골목으로 들어가면 구(舊) 벨기에 영사관이 보인다. 벨기에 영사관 곁으로 난 골목을 따라 오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사적지’라는 안내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다.
판자로 주위를 막아놓아 마땅히 출입할 곳을 찾을 수도 없고, 마을 주민들이 내놓은 쓰레기봉투 등으로 지저분한 이곳이 사적지라니…. 안내표지판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계단을 올라, 개인 소유인 듯한 집을 지나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면 ‘사적 247호 백제요지’가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가 과연 천여 년 전 백제인들의 가마터가 맞는지, 국가 사적지가 맞는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가마터의 흔적은 고사하고, 잡초만 무성한 이 곳에서 옛 가마터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흰 도화지 위에 보지도 듣지도 못한 백제 가마를 그려야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다.
단 한 장의 흙벽돌도 남아있지 않고, 비어있는 터만 남아 한반도의 긴 세월 속을 숨죽여 지나왔을 사적지는 전국적으로 꽤 많을 것이지만, ‘이처럼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곳이 또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백제시대의 중요한 유적 중 하나인 사당동 백제요지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주인을 잃어버린 무덤처럼 남아있었다.
사당동 백제요지는 백제시대 토기를 굽던 가마터로 지금까지 서울 지역에서 알려진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며, 이 희소성을 인정받아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76년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행정구역의 이름을 따서 ‘사당 백제요지’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 가마터는 서울의 남쪽 경계인 관악산에서 한강 쪽으로 뻗은 지맥의 동남측 경사면에 파괴된 상태로 남아있던 것을 1973년 4월에 발견하였다. 구릉의 경사면에는 백제도기의 파편들이 불에 탄 흙과 재 등에 섞여 발견되고 있다. 발견된 토기 조각들 중에는 사선을 어긋나게 그은 마름모 형태의 격자문양을 지닌 것이 주를 이루고 있어, 백제시대 후기에 이곳에서 만들어졌던 토기의 파편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 소유의 밭이 위치하고 있어 이 가마터는 현재까지 발굴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고 있으며, 약 200평 면적에는 흑토가 깔려 있다. 또한 이곳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500m 정도 떨어진 사당초등학교에는 신라시대의 토기요지도 발견되어 이 일대가 삼국시대부터 양질의 토기를 생산해 왔던 곳임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이곳에서 그릇을 만들었을 백제인들은 더 이상 없고, 주인이 자리를 비운 오랜 시간 동안 가마터는 허물어져 수풀과 경작지로 변했지만, 사당동 백제요지는 백제시대에 한강유역에서 토기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밝혀주는 중요한 유적이라 하겠다.
덧붙이는 글 | 이수앙 기자는 cpn문화재방송국 소속입니다. 이 기사는 iMBC에도 동시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