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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내려다보는 후쿠오카 해변
숙소에서 내려다보는 후쿠오카 해변 ⓒ 나영수
조선침략을 위하여 집결한 각지방의 왜군이 주둔하였던 곳을 표시하는 나고야성 안내판
조선침략을 위하여 집결한 각지방의 왜군이 주둔하였던 곳을 표시하는 나고야성 안내판 ⓒ 나영수
나고야 성 박물관 (여수시에서 기증한 임진왜란 유품도 소장한 임진왜란 박물관)
나고야 성 박물관 (여수시에서 기증한 임진왜란 유품도 소장한 임진왜란 박물관) ⓒ 나영수
지난 7월 말 일본 후쿠오카 정보화노인그룹인 ‘시니어넷 후쿠오카’와 교류를 위한 사전협의 차 후쿠오카를 방문했다.

방문 전 후쿠오카 인근 가라쓰(唐津)에 한국과 일본을 잇는 ‘한일해저터널’ 현장이 있다는 것을 듣고 그곳도 찾기로 했다. 1만2000년 전 한국과 일본은 이어져 있었다. ‘한일해저터널’은 1만2000년 전 대륙과 섬이 이어져 있었던 것처럼 일본과 한국을 다시 잇기 위해 추진되고 있는 사업이다.

후쿠오카 해변에 있는 호텔을 잡은 뒤 노인그룹과의 약속을 마쳤다. 이후 ‘한일해저터널 사업다’으로 연락해 이틀 후에 방문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후쿠오카는 한반도의 끝과 가장 가까운 일본땅이다. 해류의 도움으로 한국 동남단에서 출발하면 자연히 닿게 되는 곳이기도 해 한반도와 일본간 최단 해상로인 것이다. 그 옛날,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 정찰대가 이곳을 침공을 하여 쑥밭을 만들고 본격적인 대함대를 조성하여 일본전토를 유린하기 위한 함대가 후쿠오카 해안에 접근할 때 일본인들이 신으로 섬기는 가미가제(神風) 태풍으로 연합군은 괴멸되기도 했다.

ⓒ 나영수
후쿠오카에 있는 숙소를 나섰다. 7월말의 태양이 작열하는 호젓한 국도를 따라 남서쪽으로 1시간 정도 가니 가라쓰(唐津)에 도착하였다. 가라쓰는 이름대로 중국과의 역사적인 교역 항이었으며 한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의 개항지이기도 하다. 또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한 곳이다.

아울러 히데요시가 14만의 일본군을 집결시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킬 때의 발진기지이기도하다. 작은 개항지였지만 대규모 병력이 집결해 일약 대도시로 성장했다. 한국에도 당진(唐津)이란 같은 지명이 있으며 그곳은 당시 한반도와 중국과의 개항지였다.

한일해저 터널이 굴진 되는 곳엔 나고야(名護屋 - 名古屋와는 다름)성이 있어서 나고야라 부르기도 하나, 공식적으로는 사가현 (佐賀縣) 가라쓰(唐津)시 요부코쵸 토노노우라(呼子町殿ノ浦) 92번지 1에 있는 ‘국제하이웨이건설사업단’ 건설구역이다. 우리 일행은 사전에 연락을 받고 길까지 마중 나온 가라쓰 ‘후지하시 겐지’(57·藤橋健次) 사무소장 의 환대를 받으며 사무소 마당에 만들어진 설명회장으로 향했다.

차양으로 해를 가리고 사업단 마당에 만든 작은 설명회장은 우리 방문단에게는 흡족하였다. 수인사를 마친 후지하시 겐지 소장이 일본어로 설명을 하자 사무직원이 한국어로 통역을 하였으나 일본어를 더 많이 사용하여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방문단 모두가 일본어를 알고 있어 소장은 양해 하에 일본어로 설명을 다시 시작하였다.

후지하시 소장은 지난 1982년 현장조사부터 참여하였으며 이제까지 25년간을 한일해저터널에 몸 바쳐 왔다. 후지하시 소장은 이후 건설이 본격화되면 앞으로 약 15년에서 17년이 걸리므로 모두 40년 이상 이 사업에 종사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한일해저터널에 대하여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일해저터널은 분명히 군국주의 시대 일본이 대륙침략을 위하여 좀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발상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적인 문제나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일본은 2차 대전에서 패전하자 자연히 한일해저터널은 잊혀지게 되었다.

그 이후 일본의 우익진영에서 산발적인 제안이 있었으나 시행에 이르지 못하고 있던 차, 1981년 서울 '과학의 통일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한국측에 의하여 정식으로 제안되었다.

한일해저터널을 설명하는 후지하시 소장
한일해저터널을 설명하는 후지하시 소장 ⓒ 나영수
이후 1982~89년 일본 일한터널연구회가 지형, 지질조사를 마치며 201m 조사용 터널을 굴진 한 후 현재까지 20년 가까이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지난 1990년 5월 노태우 전 대통령이 해저터널 필요성을 거론하였고 1999년 9월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 순방 시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아울러 2003년 9월에 한일해협연안 시도지사교류회의서 공동연구 제안하였고, 교통개발 연구원 등은 건교부 의뢰로 용역 보고서 작성한 바 있다.

후지하시 소장은 “‘과학의 통일에 관한 국제회의’는 문선명씨가 주도한 국제회의에서 비롯되었고, 현재도 한일 양측 사업이 문선명씨의 영향력 하에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일본에서는 지난 1981년부터 학계를 중심으로 ‘한일 해저터널 건설 계획’을 연구를 하였고, 그동안 1천억원 이상의 비용을 들여 터널 외 노선과 그에 따른 지형 및 지질조사는 물론 공법연구도 해왔다.

20년 동안 진척이 없는 조사터널이 입구
20년 동안 진척이 없는 조사터널이 입구 ⓒ 나영수
400m까지 굴진한 일본측 터널입구
400m까지 굴진한 일본측 터널입구 ⓒ 나영수
한일 연구팀은 지난 1988년 10월, 한국 거제도의 지질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거제 남부면 지역에서 지하 300~400m깊이로 6개 지점을 시험공 천공하였다. 일본에서는 지난 1983년 5월 ‘일한 터널연구회’가 설립되었고 한국에서는 10년 뒤인 92년 3월 ‘한일 해저터널 기술연구회’가 창립되어 두 나라 관계자들은 그동안 10여 차례 기술교류 모임을 가졌다.

후지하시 소장은 한일해저터널 완공에는 9조엔 정도가 들 것으로 예상되며 15년의 건설기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설명을 마친 후지하시 소장은 사업소 전역과 조사터널의 내부 및 조사터널 위 전망대를 보여줬다.

210m에 이르는 제1단계 시험 굴착공사가 1987년 완성됐으며 제2단계 200m 굴착공사는 1989년 마무리됐다. 현재 탐사용 터널은 해저 400m까지 뚫려 있다. 조사터널은 20년간 그대로 방치 돼 이끼가 끼어 있기도 했다.

터널은 이키섬을 향하여 400m 굴진됐고 5도 정도의 경사로 해저로 이어졌다. 안전상의문제가 있어 수십 미터 들어가다가 발길을 돌려 터널의 위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갔다. 전망대에서는 해저터널의 일본측 첫 경유지인 이키섬도 보인다고 한다. 날이 좋으면 대마도까지 보인다고.

우리 일행은 후지하시 소장의 정중한 환송을 받으며 발길을 나고야 성으로 옮겼다. 한반도 침략의 역사적 전진기지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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