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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오덕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였을 때입니다. 글쓰기에 관한 논문이나 책을 읽고 그에 대한 반론이나 대안을 제시하라는 수업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선택한 책이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입니다. 그 수업을 담당하셨던 분이 이지호 선생님이셨는데, 제가 쓴 글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안 하시고 이오덕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만 하셨지요.
그리고 이오덕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이지호 선생님은 관심 있는 학생들을 모아 어린이 문학을 공부하는 모임(콩세알)을 만드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이오덕 선생님을 뵈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단지 이름만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것이 약간 두렵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뭔가 배울 점이 있기에 그렇게도 먼 거리를 몽땅 데려 가겠지'하는 생각으로 따라 나섰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이오덕 선생님은 많은 연세임에도 글을 쓰고 계셨습니다. 작은 선풍기 하나와 힘들면 잠시 쉴 수 있는 담요를 곁에 두고 커다란 책상에 수북하게 쌓인 책과 글들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이오덕 선생님은 멀리서 찾아온 학생들에게 당부하는 듯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지금이라면 열심히 메모를 하면서 들었을 텐데 그때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단지 더운 여름날씨와 도서관을 생각하게 하는 선생님의 서재에 쌓여 있는 책들을 바라보며 '나도 저런 서재를 가질 수 있을까'하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두 번째 이오덕 선생님을 뵈러 간 것도 이지호 선생님과 함께였습니다. 겸사겸사 하여 올라가는 자리에 제가 끼이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오덕 선생님께서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당황한 저는 감히 선생님의 손을 맞잡기가 어려웠습니다. 따스한 그 느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만, 제 마음은 아직도 선생님의 큰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음해 여름(2003년) 콩세알 연수를 하는 날에 이오덕 선생님의 부음을 들었습니다. 연수 마지막 날인 8월25일, 이지호 선생님의 강의 시간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이지호 선생님은 그 전화를 받으시고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냥 창 밖으로 한없이 펼쳐진 바다만을 바라보셨습니다. 말똥말똥한 눈을 깜박거리며 다들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오덕 선생님께서 돌아 가셨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흐르는 적막감. 그 시간은 너무나 길었습니다. 잠시 지나고 강의는 이어졌습니다. 멈출 것 같았던 강의를 마무리 한 선생님은 이오덕 선생님의 빈자리를 메우러 가셨습니다.
나이 일흔이 넘으면 어느 누구에게도 하대를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오덕 선생님은 어린아이일지라도 함부로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어른을 대하듯이 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뜻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이 세상일인지라 잘 되지 않네요.
이오덕 선생님을 스승으로 여기시는 선생님을 제가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말과 글을 살려야 한다고, 그래서 하나씩 바꾸어야 한다고 하시는 많은 분들이 이오덕 선생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지 3년이 지난 지금, 이오덕 선생님께서 평생을 다해 연구하고 실천하셨던 일들을 많은 사람들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8월 24일에는 한국글쓰기연구회에서 '이오덕 공부 마당'을 열었습니다. 내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하러 모여들 것입니다. 이오덕 선생님께서 뿌린 씨앗들이 여기저기에 싹을 틔우고 있는 것일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