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연대냐, 실망연대냐
고건 전 총리가 어렵사리 한발을 뗐다. 28일 '희망한국 국민연대'(이하 희망연대)가 발족한 것. 물론 고 전 총리는 이제껏 그래왔듯 "정치 결사체가 아니다" "정당의 모태가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대선 조직'으로 보는 시각을 경계한 것이다.
'차후 희망연대가 대선 후보로 옹립할 수도 있지 않나'라는 질문에도 그는 "희망연대는 나의 정치적 터전이 아니"라며 관련성을 부인했다. 그러면서 "내가 정치 활동을 할 때는 전혀 별개의 현실 정치의 장에서 하게 될"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거기서도 더 나아가진 않았다.
'현실정치의 장'에 정당이 포함되냐는 질문에 그는 "기존 정당도 있고 정파를 떠난 정치도 있고,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다"며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 여전히 "실용주의적인 중도개혁 세력의 연대 통합의 과정에서 나의 할 일을 하겠다"는 기존의 입장으로 대신했다.
희망연대는 발족했지만 고건 전 총리의 정치적 입장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는 셈이다. 그는 공식적으로 '정치소비자보호운동'의 기치를 내건 희망연대 5명의 공동대표 중 한 명일 뿐이다.
"정치는 고장, 정부는 실패" 싸잡아 비판
하지만 고 전 총리는 이날 행사를 위해 상당히 공을 들였다. 희망연대 출범식에 앞서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를 찾았다. 그는 "우리 정치가 이념에 미혹돼 공허한 이념대립과 당리당략에 빠져 있다"며 "실사구시에 입각해 민생을 살피고 나라의 미래를 발전시키는 새로운 정치의 희망으로 이곳을 찾게 되었다"고 밝혔다.
닻을 올린 '고건호(號)'의 뉴스는 거기서 나왔다. 그는 "다산의 애민사상, 실사구시적 관점에서 본다면 '바다이야기' 같은 사건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어느 부처의 정책 차원을 넘어서 정부의 실패"라며 "국정 시스템의 고장"이라고 쓴소리를 내뱉었다.
반면 본 행사인 희망연대 창립총회는 기대에 비해 '신선도'가 떨어졌다. 사회자는 발기인 106명을 일일이 호명했지만, 한쪽에선 "다들 전직이네?"라는 말도 흘러나왔다. 공동대표만 해도 고건 전 총리를 위시해 이종훈 전 경실련 대표, 김수규 전 서울YMCA 회장 등 전직 활동가들이 많았다. 연령대도 높다. 대부분 50, 60대고, 30, 40대는 잘 눈에 띄지 않았다.
현직 정치인 참여도 없다. 이에 대해 고 전 총리는 "새로운 정치의 그림을 그리려면 정치권과 이해관계가 없는 평범한 생활인, 학자들 중심이 돼야 한다"며 정치인 배제의 원칙을 설명했다.
시민단체 일각에선 곱지 않은 목소리도 나온다. 희망연대는 20세기 하향식 시민운동을 벗어나 21세기 상향식 시민운동을 표방했다. 특히 경실련은 이종훈 공동대표가 경실련 전직 대표 직함을 걸고 있는 것에 대해 부담스런 눈치다. 이에 대해 이 공동대표는 "경실련하고 같이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가 있다"며 "다른 시민단체와 상관이 없다"고 해명했다.
관심은 공동대표로 추대된 고 전 총리의 인사말에 쏠렸다. 그는 "지금의 정치는 역사적 과제를 방기한 지 오래"라며 "나라의 미래보다 과거에 집착하고,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으로 편을 갈라 권력을 차지하려는데 온 정신을 팔고 있다"고 정치권을 싸잡아 비판했다.
1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치러진 이날 행사는 공동대표의 선임, 규약 제정 등 박수로 일사천리로 1시간만에 끝이 났다.
"정치인들과 비공개리에 접촉하고 있다"
이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은 고 전 총리의 향후 행보였지만 '예의 그답게' 이렇다 할 답변을 내놓진 않았다. '정치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중도개혁세력의 연대와 통합에 뜻을 같이 하시는 분들과 교감을 넓혀가고 있고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해나갈 것"이라고 의욕을 드러냈다. 하지만 "특별히 시점을 말할 수는 없다"며 시기를 기약하진 않았다.
'추진력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이에 고 전 총리는 "저와 뜻을 같이 하는 정치인들과 비공개리에 접촉을 하고 있다"며 "내가 중도개혁세력의 연대, 통합을 주장한 이후 정계개편이나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학자나 정치인들의 공통 키워드가 됐다, 내가 주창하는 중도개혁세력의 연대가 계속 확산돼 가고 있다"고 자평했다.
이같이 '소걸음 하듯' 정중동의 행보를 보이는 '고건의 처지'에 대해 전문가들의 해석을 들어봤다.
김헌태 한국사회여론연구소장은 "고건은 현재 비(非)한나라, 범여권 후보로 되어 있는데 여권 내부에서 이 부분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며 "후보단일화든, 오픈프라이머리(개방형 국민경선제)든 여권 내부에서 정계개편의 가닥이 결정된 뒤 '카드'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말했다.
아울러 김 소장은 "가능성이 있는 후보여도 여권이 과거 2002년 '후단협'의 학습효과도 있기 때문에 인물 중심의 깃발 정치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여권 내 세력간 조율이 끝나고 정계개편의 축이 형성될 때를 기다리는 처지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치컨설팅 '민'의 박성민 대표는 "강금실과 오세훈을 오가는 처지"라고 혹평했다. 박 대표는 "여권의 '서부벨트 복원론'에 따라 추대가 되었다가 안되면 망신이고, 또 한나라당을 위시한 보수세력과 함께 했다가 잘못하면 호남에서 배신자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며 "그 어느 쪽에서도 스타일을 구기고 싶지 않기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다림과 줄타기의 정치
여당 내 '고건맨'으로 통하는 안영근 의원에게도 물어봤다.
안 의원은 고 전 총리의 본격적인 정치행보의 시작 시점을 '연말연초'로 내다봤다. 그는 "신당을 만들어 독자세력화 하는 것은 고건의 입장이 아니"라며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통합론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고건과 희망연대가 합류"하는 과정을 예상했다. "열린우리당 일부 이탈세력과 함께 하기 보다 일정한 '정치블록(정치집단)'을 형성할 수 있는 단계"를 지켜보는 과정이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