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이 과학을 재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겠지만 대한민국 출신 노벨상 수상자는 늘 멀게만 느껴진다. 한국인 과학자로 노벨상에 가장 가깝게 다가선 이를 묻는다면 과학에 몸담고 있는 이들은 고 이휘소 박사를 떠올리게 된다.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 오펜하이머는 "내 밑에 아인슈타인도 있었고 이휘소도 있었지만 이휘소가 더 뛰어났다"고 말했다. 1979년 노벨상을 수상한 파키스탄 물리학자 살람도 "이휘소의 게이지 이론에 많은 빚을 졌다"고 밝혔다.
20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30세에 펜실베니아 대학 물리학과 정교수에 올랐고 페르미 연구소 이론물리학부장을 역임한 이휘소는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평가받고 있지만 유독 고국 대한민국에서만 핵개발을 추진하다 음모에 희생당한 소설 속 인물로만 기억되고 있다.
책으로 만나는 이휘소
1영화로도 만들어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나 <소설 이휘소> 같은 책들을 통해 이휘소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핵폭탄 개발을 추진하다 미국의 공작으로 죽음을 당한 비운의 인물로 각색되었다.
1977년 비운의 교통사고로 불과 42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휘소 박사가 1974년 AID 차관 평가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과정에서 핵개발에 동의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평소 이휘소 박사가 핵개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이미 1971년 고국 방문 제안을 "내가 한국의 현 정권과 그 억압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칠까 걱정된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한 점을 떠올려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에게 감동받아 핵개발에 나서기로 약속했다'는 소설은 말 그대로 소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영향력은 꾸준히 확대 재생산되었다. 방송 시사 프로그램조차 컴퓨터 시뮬레이션까지 동원하여 그의 죽음을 음모론으로 다룰 정도였다. 기자는 언젠가 과학 캠프 교사로 참여했을 때 "존경하는 이휘소 박사님을 따라 꼭 핵폭탄을 만들겠다"는 중학생을 만났던 기억도 있다.
올해 그가 살았던 모습들을 따라 이휘소 박사를 살펴보는 책들이 나오고 있어 소설이 덧씌운 이미지를 걷어내고 '과학자 이휘소'를 되찾을 발판이 마련되고 있다.
"이휘소는 '팬티가 썩은 사람'"
<이휘소 평전>은 이휘소 박사의 제자이기도 했던 강주상 교수가 집필했는데 저자 자신도 물리학자인 만큼 고인의 연구 업적에 대한 평가를 더한 점이 인상적이다. <이휘소-못다 핀 천재 물리학자>는 연구 업적에 대한 전문적인 접근은 부족하지만 학생들이 읽기 편안한 문체로 물리학자 이휘소의 삶을 복원하고 있다.
이휘소라는 인물 앞에 흔히 '천재'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하지만 타고난 천재성에 기대지 않고 끊임없이 연구에 몰두했던 노력이 있었다. 한 번 자리에 앉으면 끝장을 볼 때까지 연구에 몰두하는 이휘소에게 동료들은 '팬티가 썩은 사람'이라는 별명을 붙여 줄 정도였다.
궁금한 게 많아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내던 소년 이휘소를 세계적인 과학자로 성장시킨 것은 어머니의 힘이었다. 자신은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냐는 질문에 "온 우주가 진통을 하며 태어났다"는 답을 준 어머니 밑에서 세계적인 물리학자는 자라났다.
지금도 해외 저널에서 주요 물리학자를 꼽을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이휘소 박사. 이제라도 세계는 알고 우리만 몰랐던 인간 이휘소, 과학자 이휘소를 만나게 된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 모쪼록 그가 사랑했던 고국 대한민국에서 그의 진면목이 온전히 전해지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기자는 국어능력 인증시험 시행본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