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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병의 맏이.
파수병의 맏이. ⓒ 정판수
그런데 이 콩밭과 팥밭을 노리는 녀석들이 있다. 주로 '놀갱이'(노루의 이 지역 사투리)지만 가끔 족제비도 보인다. 줄을 치고 나무를 얼키설키 박아놓아 들어오지 못하게 하지만 그 정도로 기가 죽을 녀석들이 아니다.

철조망이 아니기에 그냥 뚫고 들어온다. 들어오면 녀석들의 세상. 뜯어먹고, 밟고, 뒹구는 등 제 멋대로 하다가 심심해지면 빠져나간다. 철조망을 달면 좋으련만, 얼마 안 되는 수익을 바라고 거금을 들일 수도 없고.

생각다 못해 어르신들이 꾀를 내 파수병을 세웠다. 원래는 갓 심어놓은 씨를 까치나 까마귀가 먹지 못하도록 달아놓았으나, 이젠 다 익어 거둘 때까지 매달려 있다.

그런데 이 파수병은 벼가 익을 때 만들어놓는 허수아비와 조금 다르다. 일단 사람의 형상이 아니다. 따로 모양을 내 만들지도 않는다. 집에 있는 걸 갖다가 그냥 달아놓는다.

그러니 비료포대도 있고, 비치볼도 있고, 고무장갑도 있고, 휴대용 부탄가스통도 있고, 마대자루도 있다. 밭을 제대로 지키기엔 어수룩해 보여 농민들에게 여쭤봤다. 효과가 있느냐고. 모르겠단다.

'모르겠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꼼짝 않고 지켜보며 확인하지 않는 한 어떻게 알 것인가. 실제로 지키는 데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가져다둔 것일 게다. 녀석들에게서 농작물을 지키려고 했다는.

파수병의 둘째, 셋째, 넷째.
파수병의 둘째, 셋째, 넷째. ⓒ 정판수
달아놓은 재료가 그렇다보니 달려 있는 모습이 참 재미있다. 마침 어른 한 분이 다랭이논(계단식논)에 약 치고 나서 잠시 쉬기에, 지나가는 말로 왜 하필 저런 것들을 달아놓았느냐고 여쭤보았다. "아무리 짐승이래도, 뭔가 눈에 팍 띄어야 무서워할 게 아뇨?"

그러니까 짐승도 튀는 걸 의식하는 모양이다. 그런 점에선 성공이다. 사람인 나도 관심을 둔다면, 나보다 좀 어리석은(?) 녀석들이야 속아 넘어갈 게 아닌가.

파수병의 막내
파수병의 막내 ⓒ 정판수
제발 이제라도 녀석들이 '농투성이'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서 덜 짓밟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왕이면 파수병 5형제에게 겁을 잔뜩 먹어 다시는 들어오지 않았으면 한다.

다른 한편, 산중턱에 갈아놓은 논과 밭이 원래 녀석들의 운동장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놀지 못하게 막는다는 게 좀 서글프다. 더욱이 먹기 좋게 잘 자란 콩잎과 팥잎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바로 자기들 앞에 밥상을 차려놓은 셈 아닌가.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 '달내마을 이야기'에 나오는 '달내마을'은 경주시 양남면 월천마을을 달 '月'과 내 '川'으로 우리말로 풀어쓴 것입니다. 예전엔 '다래골(다래가 많이 나오는 마을)' 또는 '달내골'로 불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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