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의 스타일은 시스템이다."
31일 열린우리당 의원 워크숍이 열리고 있던 국회 헌정기념관 로비. 논란이 되고 있는 현안인 한미FTA, 전시작전통제권 등에 대해 한 386 재선의원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나온 말이다. 당·청 엇박자 원인 중의 하나인 노무현 대통령의 스타일에 대해 당내에서는 여전히 불만이 많지만 이 의원은 오랜 고민 끝에 이같은 결론에 도달한 듯 보였다.
"민주당 '정풍 운동'이 벌어질 당시, 천·신·정(천정배, 신기남, 정동영)이 권노갑 고문의 2선 퇴진 요구를 했을 때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물밑 접촉을 통해 천·신·정의 요구를 확인한 뒤 이를 수렴해 결과로 보여줬다."
이 의원은 대통령 본인의 의중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던 DJ와 비교하며, 노 대통령의 정면돌파형 스타일을 '소통 시스템'으로 이해하는 게 낫다는 편에 섰다. 냉소적 결론이다.
하지만 당에선 여전히 대통령의 스타일이 불만스럽다. 김영춘 의원은 최근 장문의 칼럼('좌파적 수구세력으로 전락할 것인가')을 통해 당·정 분리라는 명분 하에 "대통령의 충동적인 발언과 준비되지 않은 정치행보와 독선적인 소통 방식"이 나오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정면돌파하는 청, 뒤따라가는 당
문제는 이같은 당·청의 소통 장벽이 불신을 낳고, 정책 결정 과정의 지체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한미FTA 체결에 대해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는데, 당은 아직 당론도 정하지 못했다. 아직 정부 협상안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를 대고 있지만 미적거리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김근태 의장은 한미FTA 체결에 따른 부작용을 지적하며 '속도 조절론'을 내세우는 수준에서 정면 돌파를 피하고 있다.
이날 워크숍에서도 찬반 격론이 있었지만 김한길 원내대표는 "대통령께서도 손해보는 장사는 안 하겠다고 말했다, 협상 결과가 좋아야 찬성 당론도 정할 수 있다"며 당론을 정하기에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임종석 의원은 "당정청의 긴밀한 조율을 통해서 문제해결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며 "한미FTA 등 현안에 관한 당론을 빨리 정하자"고 촉구했다.
한미FTA 문제야 지지세력의 저항 때문이라 해도, 전시작전통제권마저 노 대통령이 주도하는 인상이다.
노 대통령은 31일 KBS 회견에서도 전작권 관련 질문을 받고 기다렸다는 듯이 "이 점은 정말, 딱 정면으로 말하겠다"며 "한나라당이 이렇게 하면 안 된다,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정면 대립각을 세웠다.
한 국회 통외통위 소속 의원은 "전작권의 경우 당이 주도적으로 끌고갈 수 있는 이슈인데 왜 부담을 모두 지려 하는지 모르겠다"라며 노 대통령이 야당과 보수언론을 직접 상대하는 국면에 대해 당혹스러워했다.
노 대통령도 살고 김 의장도 살고
여기에 최근 노 대통령이 추가한 화두가 하나 더 있다. 국가발전 장기전략인 '비전 2030'이다. 임기 말 내놓은 거대 프로젝트다.
하지만 전같지 않다. 증세 논쟁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당의 정치적 부담을 고려해, 발표 시기와 형식을 바꿨다. '대연정' 제안 때와는 달라진 태도다. 지난 30일 열린 비전 2030 보고회의에 참석한 한 주요당직자는 "노 대통령이 당에 부담을 줘서 미안하다"는 인사말을 하더라고 전했다.
또한 노 대통령은 토론자로 참석한 강봉균 정책위의장의 지적인 "'비전 2030'을 완결된 것으로 고집하면 나라가 잘못 간다, 토론을 통해 수정해나가는 롤링 시스템으로 만들어달라"는 요구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정치적 위상을 고려해 "정부 기구가 아닌 연구소 차원에서 진행해 달라"는 강 의장의 주문에 대해서는 "민관 공동의 정부 계획이 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해 달라"며 완곡하게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당·청 정책 갈등의 전환점은 지난 달 20일, '비전 2030' 토론회를 겸한 청와대 오찬이었다. 이 때 노 대통령은 김근태 의장이 추진하고 있는 '사회적 대타협'(뉴딜)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왜 협의를 안 하고 추진하느냐'고 제동을 걸었던 이전의 입장과 달리, 이날 노 대통령은 "가능하면 도와드리겠다"고 답해 힘을 실어줬다.
이후 잔뜩 고무된 김 의장은 두 달 동안의 뉴딜 행보를 정리한 뒤, 정부와 원내로 공을 넘겼다. '입법화'를 통해 성과를 내는 일만 남은 셈이다. 이목희 전략기획위원장은 "초기에는 당정청이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비쳐져 실현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지난 오찬 간담회를 통해 공동 추진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고 평가했다.
당의 협조가 필수적인 건 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비전 2030'이라는 거대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해선 정치권의 결단이 필요하다. 노 대통령은 "국가 지도자들, 또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 정책을 어떻게 가져갈 거냐에 대해서 자기 입장을 정하고,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국민들이 '이만한 사회 정책이 꼭 필요하겠다'는 결정하게 되면 시행이 되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당의 한 관계자는 김 의장의 '뉴딜'에 대해 "성장론이나 일자리 창출은 한나라당의 이슈였는데 이를 열린우리당이 선점한 효과가 있다"고 평가했고, 노 대통령의 '비전 2030'에 대해서도 "대선을 앞두고 '국가 비전'에 대한 의제 주도권을 여권이 쥘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뉴딜이든 비전 2030이든, '이슈 선점'이라는 점에서 당·청이 '윈윈'할 수 있는 프로젝트라는 인식이다.
노 대통령이 '돈키호테식 좌충우돌' 기질을 지녔다면, 김근태 의장은 '우유부단한 햄릿형'으로 평가돼 왔다. 세간에는 "돌다리도 두르려보고 건너지 않는 게 김근태다"라는 말도 돈다. 하지만 바꿨다. 지지층에게 욕먹을 각오를 하고 '뉴딜'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지지율 바닥'이라는 엄혹한 현실 앞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존 차원의 결단이다.
최근 노 대통령을 만나고 온 인사들 사이에서 "기가 많이 꺾인 것 같다"는 얘기가 나온다. 지역·계층 뿔뿔이 흩어진 지지세력을 모아야 뭐라도 할 수 있는 처지다.
요즘 여권에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유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