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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9일 오후 2시6분]

▲ 진흙탕 속에서 악어와 씨름하고 있는 생전의 스티브 어윈.
ⓒ 호주관광청
'어윈 현상(Irwin Phenomenon)'이라고 불릴 만큼 호주 전체가 악어사냥꾼 스티브 어윈의 갑작스런 사망에 대한 추모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가운데, 이에 딴죽을 건 한 여성학자가 있어서 호주국민의 분노를 사고 있다. 영국의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을 소재로 쓴 소설 <아름다운 소년 보이>의 저자 저메인 그리어 교수가 바로 그다.

런던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호주 출신 여권운동가(캠브리지 아카데미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인 중의 한 명)인 그리어 교수는 영국 <더 가디언>지에 기고한 한 칼럼을 통해서 어윈의 죽음을 '동물의 세계가 복수한 것(The animal world got its revenge)'이라고 표현했다.

지난 2004년에도 "어윈이 생후 한 달 된 아들을 악어 앞에서 흔들었다"고 맹비난을 퍼부은 바 있는 그리어 교수는 그 당시 호주 TV에 출연해서 "그는 야생동물보호를 빙자해서 돈벌이에 급급한 광대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그리어 교수는 6일 저녁 채널9의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스티브 어윈은 야생동물을 존중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다루었다. 마치 동물 위에 군림하는 전지전능한 존재처럼 으시댔다. 그래서 사고를 당한 것이다"라고 말해 가뜩이나 슬픔에 잠겨있는 호주국민들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녀의 발언에 대한 반발은 거셌다. 노동당 소속 캐빈 러드 그림자내각 외무장관은 "어윈이 야생동물보호 운동가로 이룩한 엄청난 업적은 천하가 다 안다. 마치 세상 일을 다 아는 것처럼 으시대는 그리어야말로 입 닥치라"고 강한 어조로 그리어 교수를 비난했다.

▲ 어윈의 죽음이 동물세계의 복수라고 발언해 비난을 사고있는 그리어 교수.
ⓒ TWT
피터 비티 퀸즐랜드 주 총리도 "그리어 교수는 쓰레기 같은 논리로 슬픔에 잠겨있는 호주국민들에게 상처를 준 비호주적인 사람"이라면서 "영국에서 성공했으니 그냥 런던에 눌러 살라"는 막말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다.

한편 7일 밤에 방영된 채널9의 <럭비 쇼> 진행자 폴 보튼은 "그리어를 입국금지 시켜야 한다. 스티브 어윈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야생동물의 세계를 생생하게 교육시켰는지 그녀는 모른다"고 말했다.

폴 보튼은 이어서 "스티브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서 엔터테이너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교육자였다"면서 "그에게 영향을 받은 수많은 어린이들이 동물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강변했다.

총리와 야당 당수도 국회 회의 도중에 애도

이런 가운데에서도 어윈을 기리는 추모의 물결은 끊이지 않고 있다.

어윈은 생전에 퀸즐랜드 선샤인코스트에 위치한 호주동물원(Australia Zoo)을 운영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혼이 깃들어 있는 호주동물원에 찾아와서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꽃다발과 함께 그림엽서, 시 등을 써서 바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동물원 입구는 온통 꽃으로 뒤덮였다. 호주동물원 웹사이트에도 그의 사망 후 사흘 동안 무려 30만 명 넘는 사람들이 방문해서 애도의 뜻을 글로 남겼다.

9월 5일 오전, 국회의사당에서 회의를 진행하던 존 하워드 총리와 킴 비즐리 노동당 당수가 공식적인 추도사를 했다. 이미 기자회견을 통해서 애도를 표한 바 있는 두 정치지도자는 "호주가 너무 큰 인물을 잃었다"고 말해 스티브 어윈을 잃은 호주국민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 엿보게 만들었다.

9월 6일자, <시드니모닝헤럴드>는 스티브 어윈의 죽음을 애도하는 분위기가 마치 존 F. 케네디, 존 레논, 다이애나 등이 사망했을 때와 비슷하다고 보도 했다. CNN도 같은 날, 미국 팬들의 분위기가 호주와 비슷하다는 뉴스를 전했다.

▲ 생전에 어윈이 운영하던 호주동물원이 추모객들이 놓고 간 조화로 뒤덮여있다.
ⓒ TWT

▲ 한 어린이가 호주동물원을 찾아 꽃을 바치고 울음을 터트리고 있다.
ⓒ TWT
가족장례식으로 결정, 추모행사는 별도로

이런 현상에 대해서 채널9의 < Today > 진행자 제시카 로우는 "그가 호주의 상징(Australian icon)이었기 때문"이라면서 "호주 국민들이 주 장례식(State Funeral)으로 그를 떠나보내고 싶어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말했다. 한편 채널9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의 결과는 86% 찬성.

그러나 스티브 어윈의 아버지 봅 어윈의 뜻은 달랐다. 스티브가 6살 되던 해 생일선물로 뱀을 줘 오늘의 '악어사냥꾼'이 있도록 만든 봅 어윈은 본인이 직접 설립한 호주동물원 앞에서 호주 전역과 미국, 브라질, 프랑스, 스웨덴 등에서 찾아오는 조문객들을 맞았다.

그는 7일 오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스티브는 그냥 평범한 녀석(just an ordinary bloke)'이었다, 존 하워드 연방 총리와 피터 비티 퀸즐랜드 주 총리가 제안한 주 장례식은 스티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국민의 뜻은 감사하지만, 앞으로 1주일 안에 가족장으로 치를 예정"이라면서 "가족장과는 별도로 2주 안에 스티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공공장소에 모여서 추모행사를 가질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평소에 아들이 입었던 것처럼 카키색 반소매 셔츠 차림을 한 봅 어윈은 "스티브의 비보를 접하는 순간 나는 또 하나의 슬픔과 마주하고 있었다"고 기가 막힌 얘기를 털어놓았다. 같은 날, 송아지를 낳다가 죽은 엄마소를 동물원 뒤뜰에 묻고 있었던 것.

팬들의 제안으로 '인터내셔널 카키 데이' 제정

▲ '인터내셔널 카키 데이'의 제정을 보도한 <데일리텔레그래프> 인터넷판.
아쉽게도 주 장례식의 기회를 갖지 못한 스티브 어윈의 팬들은 '악어사냥꾼'의 트레드마크인 카키색 셔츠와 반바지를 입는 날을 정해서 스티브가 원했던 '야생동물보호의 날'로 삼기로 결정했다.

바로 오늘(9월 둘째 금요일)이 첫 '인터내셔널 카키 데이'다. 이런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호주동물원 웹사이트에 애도의 글을 남긴 미국인이다. 그는 조문객 중에 카키색 차림이 많은 걸 발견하고 '유전자 환자를 위한 청바지 데이(Jeans For Genes day)'를 떠올렸다고 썼다.

한편 채널7의 인기프로그램 < Today Tonight > 진행자 나오미 롭슨은 호주동물원에서 실황방송을 하면서 도마뱀이 달린 카키색 옷을 입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요즘 카키색 옷을 입고 다니는 어린이들이 많은 것도 스티브 어윈 추모 분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부모들은 아직도 스티브 어윈의 죽음을 자녀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채널7 < Sunrise >의 보도에 의하면, 스티브 어윈이 '악어사냥꾼' 캐릭터의 만화주인공이어서 특히 3-6살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높은데, 일부 부모는 궁여지책으로 TV뉴스 자체를 시청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프로그램은 "스티브 어윈의 죽음을 마치 자신의 가족을 잃어버린 것처럼 슬퍼하는 어린이들이 많다"면서 "정말 그 아저씨가 죽었느냐고 물으면서 저녁 내내 울음을 터뜨린 어린이도 있다"고 보도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호주의 저명한 심리학자 조 램블은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부모가 자녀들에게 스티브의 죽음을 빨리 알려주는 게 좋지만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고로 죽을 수 있다는 얘기를 먼저 해야 한다"는 등의 조언을 했다.

죽음의 순간 찍은 끔찍한 장면 방영 논란

▲ 생전에 악어를 능숙하게 다루던 스티브 어윈.
ⓒ <애니멀 플래닛>
스티브 어윈의 죽음 때문에 당혹스러운 건 어린자녀를 둔 부모들뿐이 아니다. 그의 20년 친구이면서 15년 동안 매니저로 일한 존 스테인톤은 가오리의 독침공격으로 어윈이 죽어가는 장면이 생생하게 녹화된 필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 필름이 방영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존 스테인톤은 CNN의 래리 킹과 인터뷰를 하는 동안 몇 차례 울먹이면서 "경찰과 함께 그 테이프를 봤는데 너무 끔찍했다. 카메라맨은 그걸 찍지 말았어야 했다"면서 "방영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테이프를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티브 어윈은 생전에 "나에게 어떤 상황이 벌여지더라도 카메라 촬영을 멈추지 말라"고 동료들에게 당부했다. 그는 2005년 CNN과의 인터뷰에서도 "나는 항상 죽음 앞에 놓였지만 죽음이 두렵지는 않다"고 말한 바 있다.

스테인톤의 인터뷰에 이어진 CNN의 보도에 의하면 지난 5일, 태국 방콕 북부의 코끼리 단지에서 스티브 어윈을 기리는 큰 규모의 추모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같은 방송은 미국과 스웨덴에서도 조만간 태국과 비슷한 추모행사가 열릴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중단됐던 다큐멘터리 계속 촬영하기로

스티브 어윈은 TV 프로그램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미국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버는 호주사람으로, 멜 깁슨이나 니콜 키드만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1년 내내 카키색 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지낼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다.

수천만 달러의 재산을 소유한(약5천억 원으로 추산됨) 스티브 어윈은 1970년 농부인 아버지가 직접 지은 방 3칸짜리 벽돌집에서 살았다. 4식구가 사는 호주 중산층의 집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주거환경이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스티브 어윈은 세단도 아닌 4륜구동형 소형트럭을 몰고 다니면서 오직 일하는 데만 몰두했다. 그는 2002년 <쿠리어 메일>지와의 인터뷰에서 "나에게 황금덩어리 같은 건 필요 없다, 다만 지구에서 가장 훌륭한 자연보호구역을 만들고 싶은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좀 우아하게 살라"고 충고하는 친구에게 "잠꼬대 같은 소리 마라, 나는 매년 호주동물원을 찾는 1백만 명 가까운 방문객들을 위해서 악어 쇼를 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가 죽은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가 번 돈의 대부분은 야생동물공원 확장사업에 쓰여 졌다. 그 다음으로 돈을 많이 쓴 분야는 환경보호단체, 동물병원, 야생동물공원, 고래보호단체, 사회복지단체에 지속적인 기부금을 내는 것이었다.

한편 어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제작이 중단된 해양 다큐멘터리의 촬영이 계속될 예정이다. 어윈이 숨지는 날 같은 배를 타고 함께 바다에 나갔던 프랑스 출신의 전설적인 해양탐험가 자크 쿠스토의 손자 필립 쿠스토가 대타로 나선 것.

그는 6일 오후 CNN 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 "어윈은 위대한 작업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어윈의 매니저 존 스테인톤이 나와 함께 나머지 작업을 하자고 제안해서 수락했다"고 밝혔다.

스티브 어윈 사망 후에도 호주동물원은 단 하루도 문을 닫지 않았다. 현재 스티브 대역으로 악어 쇼를 진행하고 있는 토비 밀리아드는 "스티브처럼 악어를 잘 다루는 사람은 지상에 없다. 쇼를 진행하는 동안 스티브의 음성이 계속 들리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Show must g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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