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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 고어 전 부통령이 최근 호주를 방문하던 중 미묘한 발언을 쏟아내 대선 재도전의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3일 프랑스 도빌에서 열린 제32회 아메리칸 영화제에 참석한 고어 전 부통령.
ⓒ AP=연합뉴스
'환경지킴이'가 되어 6년 만에 돌아온 앨 고어(58) 전 미국 부통령. 그의 최근 행보가 상당히 수상쩍다. 전직 정치인이 난데없는 영화배우로 데뷔해서 찍은 첫 작품 <불편한 진실>의 홍보를 빙자(?)해 2008년 대통령선거를 겨냥한 사전선거운동 혐의가 짙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지난 9월 10일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난 아직 (2000년 대선에 이은) 두 번째 대통령선거 출마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다(I'm still undecided about whether to run for the presidency a second time)"고 말해서 의구심이 더 커졌다.

앨 고어는 눈이 휘둥그레진 기자들을 향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다음 "그러나 나는 30년 동안이나 정치활동을 했다. 다시 정치 쪽으로 '인생의 기어'를 바꾸고 싶지 않다"는 말을 덧붙여 기자들을 맥 빠지게 만들었지만, 차기 대통령선거 출마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발언이었다. 다음 선거까지 2년, 아주 미묘하고 절묘한 시점이다.

그의 언행이 미심쩍은 것은 그뿐이 아니다. "2002년 선거에서 승리했다면 반(反)테러정책 등에서 조지 부시 현 대통령보다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자신과 부시 대통령의 차별화를 꾀하면서 6년 전에 대통령의 기회를 주지 않은 유권자들을 은근하게 자극했다.

대통령 선거의 중요이슈가 될 가능성이 다분한 환경문제도 그렇다. "온실효과 가스 배출을 줄이려는 교토의정서 채택을 반대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의 반(反)환경적인 마인드가 실망스럽다"는 등의 발언으로, 앨 고어는 에둘러 선거운동의 불씨를 지피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렇듯 앨 고어가 호주방문을 이용해서 속내를 털어놓을 것 같은 징후를 보이자, 눈치 빠른 일부 호주언론이 '앨 고어 대선출마' 애드벌룬 띄우기를 자임하고 나섰다. <시드니모닝헤럴드>와 호주국영 ABC-TV 등이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인 것.

고어 또한 기다렸다는 듯이 이라크 전쟁과 환경정책 등을 비판하면서, 지난 6년 동안 희미해진 자신의 존재를 또렷하게 각인시키려 애썼다. 최대한 여러 매체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는 모습이 마치 선거운동을 하는 후보를 연상케 만들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고어가 연기할 시드니 시나리오의 전부였다.

앨 고어는 힐러리 클린턴의 도우미?

▲ 환경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에 출연하여 호평을 받고 있는 앨 고어 전 부통령.

한편 '슈퍼 환경운동가' 앨 고어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환경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의 흥행을 통해서 얻는 홍보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답변을 일부러 애매모호하게 눙친다고 믿는 것. 대통령 후보에게 보이는 언론의 관심을 이용해서 거꾸로 환경운동을 한다는 분석이다.

또 다른 한편(특히 호주국영 ABC-TV)에서는 "앨 고어가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계속 절친한 친분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부각시켜서 대통령 후보로 '2% 부족한 힐러리 클린턴'을 도와주려는 미국 민주당의 장기적인 선거전략"이라는 독특한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한동안 기세 좋게 나가다가 한풀 꺾인 듯한 힐러리 클린턴을 위해서 앨 고어가 희생번트를 대고 있다는 해석인데, 그가 2000년 선거에서 억울하게(?) 패배하고도 깨끗하게 대법원 결정에 승복한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논리다.

환경지킴이로 이미 남은 인생의 방향타를 고정시킨 앨 고어가 2008년 대선의 분수령이 될 민주당 경선에 나가서 기꺼이 경선 흥행용 조연배우로 혼신의 연기를 할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되는 대목이다.

물론 그런 예상엔 고어의 친구이자 오랜 정치적 동반자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변수가 크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9월 11일, 호주국영 AVC-TV의 시사프로그램 <7:30 리포트>에 출연한 앨 고어에게 사회자 케리 오브라이언이 다음과 같은 미묘한 질문을 던졌다.

"두 사람의 임기가 끝난 후 서로 냉냉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는 잘 지내느냐?"고 물은 것. 다분히 2008년의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쟁할 가능성이 높은 힐러리 클린턴을 의식한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고어는 힐러리의 이름은 입에도 올리지 않으면서 "클린턴과는 아주 잘 지낸다. 밤을 꼬박 새우면서 대화를 하느라 이틀 동안 함께 지내기도 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로 2주전 그의 60세 생일도 축하했으며, 2주 후에 뉴욕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답변했다.

▲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의 포스터
존 하워드 호주 총리와의 열띤 공방

자신의 정계복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호주를 방문하는 동안 앨 고어는 마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주연배우 같은 모습이었다. 각종 언론과의 인터뷰, 팬과의 만남 등 여느 배우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결과인지 흥행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환경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은 호주에서 잘 나가고 있다.

9월 11일자 <시드니모닝헤럴드>는 지난 5년 간 환경운동가로 활동해온 앨 고어를 자세하게 소개했다. 특히 영화제목을 빗대어 '불편한 관계'에 놓여있는 존 하워드 호주총리와의 공방을 시리즈로 보도했다.

앨 고어는 영화 <불편한 진실>을 만들기 전에도 각종 강연을 통해서 온실효과 가스 배출을 줄이려는 교토의정서 채택을 반대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의 미국과 존 하워드 정부의 호주를 강력히 비판했다. 유독 두 나라만 의정서에 서명을 하지 않아서인지, 영화 속에서도 호주는 미국과 더불어 강력하게 비판을 받는 나라로 등장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영화의 흥행 호조와는 달리 앨 고어의 호주방문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존 하워드 호주 총리는 고어의 호주방문에 대해서 질문하는 기자들을 향해 '벌레 씹은 표정'을 감추지 않으면서 노골적인 비판을 퍼부었다.

고어가 호주의 환경정책을 비판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이 '부시의 두 번째 푸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절친한 친구(?)인 조지 부시 대통령을 맹비난했기 때문이다. 전례로 보아, 우방국가의 전직 부통령이면 외교관례상 한 번쯤 만나야 하지만, 그는 기자들을 향해 "고어를 만나지 않겠다"고 기자회견 초반에 못박아 버렸다.

존 하워드 총리는 이어서 "호주의 환경정책은 사실관계에 근거해서 운영된다. 물론 앨 고어의 영화도 사실에 근거했지만, 호주의 산업과 수출, 고용문제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고하는 수준에서 영화를 관람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존 하워드의 공격에 대해 방어에 나선 앨 고어 또한 만만치 않은 입심을 보였다. "환경문제를 한 국가의 경제문제와 연관시켜서 저울질 하다니…. 경제에 타격을 주는 환경정책을 수용할 수 없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라고 하워드를 공박했다.

부시 때리기는 고도의 선거전략

호주방문을 통해서 보인 앨 고어의 언행은 두 가지 관점에서 특히 주목을 끌었다. 하나는 환경문제 공론화를 통한 정공법이고, 다른 하나는 '부시 때리기'를 통한 앨 고어의 차별화된 이미지 제고였다.

앨 고어는 호주국영 ABC-TV의 간판 시사프로그램 <7:30 리포트>에 출연해서, 평소의 이미지와는 달리 작심한 듯 조지 부시 대통령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다. 프로그램 진행자 캐리 오브라이언은 폴 키팅 전 호주총리와 더불어 초등학교 출신 저명인사로, 30년 가까이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인터뷰 기술이 뛰어난 베테랑 방송인이다.

캐리 오브라이언의 유인성 질문에 걸려든 앨 고어는 "조지 부시가 일으킨 이라크 전쟁은 잘못된 판단으로 야기된 재앙"이라고 비판하면서 "사담 후세인이 오사마 빈 라덴이나 알 카에다와 연계됐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9·11 테러 이후 전 세계가 미국 편이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등을 돌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목소리의 톤이 한껏 높아진 앨 고어는 이어서 "나는 첫 번째 걸프전쟁을 지지한 사람이지만 이번 이라크 진입은 심각한 작전미스(a serious strategic mistake to go into Iraq)였다"면서 "미국은 가능한 대로 빨리 철군해야 한다(getting out of there as quickly as possible)"고 주장했다.

고어는 미국의 책임회피가 부담스러운 듯 "이라크의 내전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도덕적인 책임을 간과하는 것 같아 고통스럽지만 그곳에 머문다고 해서 무엇이 나아질 것인가?(what good comes from staying)"라고 반문했다.

캐리 오브라이언이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2008년 대선에 출마할 것이냐"고 다시 한 번 묻자 "내 나이 57살이다. 30년 동안 정치계에 머물렀고, 너무 늦은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다"라고 딱 잡아떼지 않은 것.

나이 얘기가 나오자, 오브라이언이 반색을 하며 "레이건 전 대통령은 훨씬 나이가 많았다"라고 언급하자 고어는 "하긴 그렇다"면서 출마가능성을 내비치는 듯한 뉘앙스의 답변을 했다. 또 다시 앨 고어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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