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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 가는 길
순천만 가는 길 ⓒ 안준철
전남 순천만을 걸어서 갈 생각을 한 것은 꽤 오래 전 일입니다. 전주가 고향인 저는 순천에 이사와 살면서도 순천이 바다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동네 산에 올랐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바다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지요. 평소 걷기를 좋아하는 저로서 그날 이후 걸어서 바다까지 가보고 싶은 생각을 품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산에 갈 생각으로 배낭을 꾸렸다가 발길을 순천만으로 돌린 것은 봄기운이 막 느껴지기 시작하던 어느 해 2월 하순경이었습니다. 개학을 며칠 앞두고 아이들과 만날 마음의 준비도 할 겸 혼자만의 산행을 계획했다가 갑자기 행선지를 바꾼 것이지요. 제 주변에는 아무도 그 길을 가본 사람이 없어서 염려 반 설렘 반으로 첫 발을 내딛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순천만 가는 길
순천만 가는 길 ⓒ 안준철
어제(16일)도 저 혼자서 집에서 나설 생각이었습니다. 가을이 되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일종의 방랑벽이 도질 기세였는데, 그것도 나이 탓인지 집에 혼자 남아 있을 아내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습니다. 정작 아내는 저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해줄 마음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결국은 제가 재촉을 하여 함께 가게 된 꼴이 되었지요.

제가 사진기와 우산을 챙겨 배낭에 집어넣는 동안, 아내는 따뜻한 커피와 꿀물을 준비했습니다. 주말에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고, 비가 오다 보면 날씨가 갑자기 추워질 가능성도 있어서 몸을 데울 따뜻한 차와 음료를 준비한 것이지요.

꽃과 나비
꽃과 나비 ⓒ 안준철
동천 산책길을 벗어나자 끝이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길 위에 아무도 지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길가에 핀 들꽃을 사진기에 담으려고 잠깐 반 무릎 자세로 앉았다가 일어서면 까마득히 먼 곳에 아내가 하나의 점으로 서 있곤 했지요. 사람 걸음걸이가 빠른 것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순천만 가는 길
순천만 가는 길 ⓒ 안준철
우리가 비를 만난 것은 집을 나선 지 약 두 시간 반쯤이 지난 뒤였습니다. 먼발치로 순천만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할 즈음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배낭에서 우산을 꺼내어 아내에게 건네 주었고, 우산을 건네 받는 아내의 표정은 비를 뿌리기 시작한 흐린 하늘과 상관없이 한없이 밝기만 했습니다. 우리는 우산 위로 떨어지는 기분 좋은 가을 빗소리를 들으며 계속해서 걷고 또 걸었습니다.

순천만 가는 길
순천만 가는 길 ⓒ 안준철
먼 길을 걷는 매력은 긴 호흡에 있습니다. 사뭇 오랫동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길 수 있지요. 아니, 어떤 생각을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생각을 비운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혼자만의 여행을 즐기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지요. 저는 그런 욕구를 '쓸쓸해지고 싶은 이기심'이라고 잠깐 스치듯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순천만 가는 길
순천만 가는 길 ⓒ 안준철
이름만 말하면 다 알 만한 한 유명시인이 어느 자리에선가 요즘 외롭지 않아 미치겠다고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외로워서 미치겠다는 말은 몰라도 외롭지 않아 미치겠다는 말은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개가 자기 상처로 진주를 만들어내듯 사람 감동을 시키는 빼어난 작품도 어떤 외로움이나 상처가 계기가 되어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되는 수가 많지요.

순천만에서
순천만에서 ⓒ 안준철
저도 알량한 글이라도 써야 할 때는 가끔 혼자만의 쓸쓸한 시간을 갖고 싶어집니다. 문제는 쓸쓸하고 싶어도 함께 사는 사람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지요.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면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 욕구가 비록 영혼이 쓸쓸해지는 것이라고 해도 아내를 소외시켜야 하니 이기심이라고 할 수밖예요.

순천만에서
순천만에서 ⓒ 안준철
가을입니다. 배낭 하나 짊어지고 길을 떠나기 좋은 계절이지요. 언제 시간이 나시거든, 아니 시간을 내셔서라도 걸어서 바다까지 가보시지 않으시겠어요? 쓸쓸하고 싶거나, 혹은 행복하고 싶거나 말입니다.

저도 가을이 가기 전에 예쁘고 앙증한 꽃들이 다투어 피어 있는 동천 꽃길을 지나 순천만으로 가는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길목으로 한 번 더 접어들고 싶습니다.

제 예감으로는 그때도 아마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설 것 같습니다. 나이 탓인지 제 눈앞에서 아내가 어른거리는 것이 싫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멀리서 보면 보일 듯 말 듯한 그 작은 점으로라도 서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행복한 여행을 꿈꾸고 있는 셈이네요.

순천만 대대포구
순천만 대대포구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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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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