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에 올 때 자동차 가져오지 마세요.”
'마쯔다'시 시민농원 이용규칙 11조
한국으로 돌아와서 며칠 동안은 정신이 없었다. 밀린 농사일이 마치 갓 태어난 제비새끼들이 어미 제비가 먹이 하나를 물고 제비집으로 돌아오면 이걸 서로 받아먹으려고 주둥이를 제 머리통보다도 더 크게 벌리고 찍짹 거리는 꼴이었다.
출국 며칠 전에 심은 무 밭은 바늘 같은 풀들이 돋아나 있었고 포토에 500포기나 심어 놓은 김장배추는 4엽 정도 자라서는 어서 옮겨 심어 달라고 나를 열렬히 반겼다. 동네 집집마다 마늘 심는다고 분주한 탓에 올해는 윤달이 있어 절기가 늦나보다 싶어 덩달아 마늘 파종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정신없기는 일본연수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좀 빠듯한 일정으로 외국으로 연수를 다녀 온 사람들은 알 것이다. 방문했던 장소와 만났던 사람들이 뒤섞여 기억 속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다.
겨우 5일 동안에 일본의 도시농업을 배우기 위해 하루 두 세 곳씩 방문하여 매번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자료와 명함을 교환했으니 내 기억력만 탓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행히 우리는 일본 도시농업 연수 주관단체인 ‘사단법인 전국귀농운동본부’ 측의 혹독한 다그침으로 매일 소감문과 평가문, 그리고 건의사항을 꼬박꼬박 써 내야했기에 이 기록물을 포함하여 개인적으로 촬영한 총 세 시간 분량의 동영상, 1000여장의 사진들이 부실했던 내 기억을 복원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별도의 주차시설이 없는 시민 농원
하나하나 기억을 되살려가며 자료들과 기록물을 퍼즐 맞추듯이 기억의 제 자리에 맞추다 보니 당시에는 '그러냐?' 하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하나가 선연하게 떠올랐는데 바로 마쯔다(町田)시 시민농원 이용규칙 11조다.
모두 16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 이 시민농원의 이용규칙 중 11조야말로 이번 일본연수에서 알게 된 일본 농업정책의 기본정신이라 할 것이다. 고도로 기계화되어 있는 일본의 화학농업 쪽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우리 연수단이 유기재배 도시농업 분야에서 만났던 공무원들과 그린투어리즘의 현장에서 받았던 느낌도 같은 것이다.
소도시의 주택가 텃밭들을 조사하다가 만났던 이름 없는 지역주민들에게서도 위 이용규칙 11조에 담긴 정신과 가치 '농장에 올 때 절대 자동차를 가져오지 말라'는 것이 이 조항이다.
그래서 이 시민농원에는 별도의 자동차 주차시설이 없다. 자전거를 타고 오든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오라는 것인데 매우 인상 깊었던 것은 이것이 단순 권고사항이 아니라 위반하면 시민농원 이용자격을 박탈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시민농원의 이용자격 박탈은 매우 심각한 수준의 문제가 생기지 않은 이상 주어지는 조치가 아닌 점을 고려할 때 도시문제의 모든 근원에는 자동차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 같았다.
주말농장에 가면서 야영장 가듯이 자동차에 불판과 삼겹살, 막걸리 통을 가져가는 한국의 풍경과는 딴판이었다. 농사가 단순히 산업의 한 분야, 또는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공장쯤으로 이해되는 게 아니라 농업의 교역외적 가치인 환경보전이나 자연학습, 전통문화, 도시 열섬현상 방지 등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훈련하는 공간으로 도시농업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하는 조항이었다.
같은 이용규칙 15조에는 이 시민농원에 쓰레기장이 없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농사 부산물은 자신의 구획 안에서 처리하도록 하며 발생되는 생활쓰레기는 고스란히 가져가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처럼 자연을 대하고 지역 원주민을 바라보는 정책당국의 시각은 지역 개발정책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게 마련인데 나가노(長野)현 이이야마 시에 있는 모리노이에 그린투어리즘 현장을 방문하여 하루 숙박을 하면서도 알 수 있었다. 한국의 지역개발과정과는 사뭇 다른 방식을 보게 된 것이다.
| | 1990년에 이미 '시민농원정비촉진법' 만들어져 | | | 전문농업상담원 배치-10평 연간 이용료 15만원 | | | |
| | | ▲ 농기구 보관함 | ⓒ이동범 | 도쿄도(東京都)에 속한 마쯔다 시는 총 여섯 개의 시민농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농원 당 적게는 50개, 많게는 80개 구획을 갖고 있다. 열 평에서 열 두 평 되는 1구획 당 연간 1만 8000엔 정도의 이용료를 받는다.
요즘 환율이 8.4:1 정도이니 1년에 15만 원 정도에 이용하는 셈이다. 우리가 방문 할 당시 시민농원 신청자는 정원의 열배 정도가 밀려 있다고 했다. 시민농원 단지 안에는 농기구 보관함과 샤워장이나 수도시설이 깔끔하게 잘 되어 있었다.
1995년에 첫 농장이 만들어진 이후 1년이나 2년 마다 한 개 농장씩 늘여나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농장에는 전문 농업상담원이 1-2명씩 배치되어 있었고 우리가 방문했던 주우세이(忠生)시민농원에는 마쯔다시 농업진흥과의 쿠에가야(熊谷)주사가 담당이었다.
쿠에가야씨는 ‘땅콩 아줌마’얘기를 해 주었다. 시민농원에 땅콩을 심었던 어떤 아줌마가 땅콩을 수확해서 규정을 위반하고는 땅콩 한 자루를 시민농원 담당 공무원 책상에 놓아두고 가서 그 사람의 집을 찾아가 되돌려 주느라 골치 아팠다는 얘기였다. 공무원은 어떤 답례품도 받지 않아야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쿠에가야씨 얘기를 듣다보니 불평인지 신바람인지 분간이 안 갔다. 시민농원이 워낙 경관이 좋고 조용하다 보니 택시 운전사들이 차를 받쳐두고 잠을 자기도하고 부랑자들이 여기에 둥지를 틀고 밤에 서리에 나서기도 해서 담당 공무원들이 불침번을 서기도 한다고 했다.
여러 민원으로 골치 아프다고 엄살을 피웠지만 풀을 매고 불침번을 서는 일이 싫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일본에는 1990년 6월에 ‘시민농원정비촉진법’이 만들어져 시민들에게 레크리에이션이나 요양 공간, 휴게시설, 농지를 제공하는 법적 근거들이 마련되었다고 한다.
이창우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선임연구원의 발제문에 따르면 2005년 3월 현재 일본의 도시농원 수는 3001개소이고 구획 수는 15만 3727개소라고 한다. / 농주(農住 또는 濃酒) | | | | |
덧붙이는 글 | <전북일보> '특별기획' 난에 전면에 걸쳐 연재되고 있는 일본도시농업연수기다. 이 글은 9월 13일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