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장사를 하는 남편의 퇴근시간은 저녁 10시가 훌쩍 넘어갑니다.
하루 종일을 앉지도 못하고 서 있어야 하는 탓에 남편은 집으로 돌아오면 장사는 잘 됐는지. '진상' 손님은 없었는지. 유치원에서 친구와 다퉜다는 큰 아이 얘기까지 하고 싶은 얘기가 줄줄이 엮인 제 마음은 아랑곳없이 차려주는 밥만 겨우 먹고는 바로 잠자리에 들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아이들도 아빠 얼굴을 제대로 본 지가 언젠지, 오버 좀 해서 아빠 얼굴이 기억이 안난다고까지 합니다.
삶에 여유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이다보니, 퇴근하는 아빠의 손에 들려 있는 따듯한 붕어빵 한 봉지, 과일은 기대해 본 적도 없고, 또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아빠가 바쁘다는 걸 아이들도 알고 있는지 투정 한번 부리지 않은 아이들이 기특해서 그냥 제가 사주고 맙니다. 그게 속이 편합니다.
그런데 이런 서운한 맘을 아는지 얼마 전 퇴근하는 남편의 손에 검정봉지 하나가 들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이래서 오래 살고 볼 일인가 봅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남편도 이젠 변하려나 봅니다.
"뭐예요?"
나를 위해 맛이 제대로 든 사과라도 사왔나 싶어 반색을 하며 봉지를 건네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든 것은 단내 나는 사과도, 따끈한 붕어빵도 아니었습니다.
"이게 뭐예요?"
"보면 몰라? 대파잖아!"
"대판 줄 누가 모르나? 이걸 왜 사왔냐고?"
"국에도 넣어 먹고, 반찬 할 때도 넣으라고. 대파에 들어 있는 성분이 피를 맑게 해준다잖아. 배고프다 밥이나 줘!"
노랗게 말라비틀어진 대파 잎사귀가 내 눈에는 물음표처럼 보이는데, 남편은 몸에 좋으니까 아무 말도 말고 그냥 먹으라는 말로 그 많은 물음표에 마침표를 찍어버립니다.
'사 오려면 좀 멀쩡한 걸 사오든지. 아니야. 이런 걸 돈주고 샀을 리가 없지. 아마 얻어왔을 거야. 공짠데 그냥 먹지 뭐.'
반 이상을 버려야 했지만 공짠데 그깟 게 뭐 대순가 싶어 잘 다듬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습니다.
계란찜에도 넣고, 김치찌개에도 넣고, 부침개에도 넣어먹으며 하루종일 공짜의 진미를 제대로 느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밤 남편의 손에는 또 검정봉지가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어제보다 더 시든 대파가 들어 있었습니다.
"또 대파야?"
"그냥 먹어!"
"알았어요. 몸에 좋으니까 잔소리 하지 말고 먹어라 이 말 하려고 그러지?"
어차피 공짠데 이러쿵저러쿵 투정부릴 게 뭐 있겠는가 싶어서 이번에는 큼직큼직하게 국물용으로 썰어서 냉동실에 넣어뒀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그 뒤로도 며칠을 더 대파와 함께 퇴근을 했고, 더 이상 대파가 처치곤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한마디를 던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대파 얻어오지마요!"
"누가 얻어왔대?"
남편의 대답에 기가 막혔습니다.
"그럼 사왔다고? 이렇게 다 시든 것을 돈을 주고 왜 사와?"
평소 애들을 위해 과자 한 봉 안 사오던 사람이 시든 대파를 돈까지 줘가며 사왔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배신감까지 드는 겁니다. 하지만 남편은 또 피곤하다는 이유로 수저만 놓으면 잠자리에 들어버렸습니다.
'그래 내일 아침에 두고보자.'
꿈에서 저의 이 가는 소리를 들었을까요. 눈뜨기가 무섭게 집을 나서버리네요. 애먼 대파한테만 화풀이를 했습니다. 대파향으로 따끔해진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이에요.
어제 여느 때보다 조금 일찍 집으로 온 남편은 동대문 시장에 가야 한다며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얼마만의 외출인지. 갖다붙이기도 민망한 남편의 첫 데이트 신청 때문이 아니라 남편의 기분 여하에 따라 옷 한 벌 얻어입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가슴이 콩닥콩닥 설레었습니다.
언제 저렇게 컸는지 엊그제만 해도 엄마 없으면 안된다고 줄줄 눈물 꼭지를 틀어놓던 아이들이 "엄마, 아빠 잘 갔다와"하며 서로를 다독이며 잠을 자 주었습니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남편의 손을 잡고 어둠을 헤치며 주차장으로 가는데, 희미한 가로등 아래 즐비하니 놓여 있는 낯익은 대파가 보였습니다.
자식들의 대접을 받아야 할 할아버지가 바지춤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채 쭈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깜깜한 밤에도 좌판을 걷지 못하고 대파들을 쓰다듬으며 앉아 계셨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정 많은 남편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보!"
잡고 있던 남편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응!"
남편 역시 제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우리한테는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사는 1500원이 할아버지에게는 삶의 이유가 될 수 있으니까. 비록 시들어버리고 네 식구가 먹기엔 많아도 그냥 먹자는 뜻이었을 겁니다.
가을의 밤바람이 유난히 차가웠지만 가슴 속은 장작불을 지펴놓은 듯 훈훈해져 왔습니다. 피를 맑게 한다는 대파가 남편의 손을 거치니 마음까지 깨끗하게 씻어주는 사랑의 대파가 되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저 역시 내일부터는 할아버지의 낡은 좌판의 단골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도 투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