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대법원장의 '듣기 민망한 표현'을 두고 얼굴 붉히는 데가 있다. 검찰이다. 정상명 검찰총장이 나서서 '유감'을 표명했다.
그럴 만도 하다. 자신들이 만든 진술조서를 밀실에서 만든 것이니까 던져버리라고 했다. 울컥할 만하다.
국민들 입장에서야 정치권이 연일 쏟아내는 '듣기 민망한 표현'에 이골이 난 터라 감도가 떨어지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부적절한 표현이었다고 하니 그렇다고 치자. '듣기 민망한 표현'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치권도 표현이 부적절했다고 입을 모으는 판이다.
입을 모으는 게 또 있다. 이용훈 대법원장의 '선의'다.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하려는 취지에서 그런 표현이 나왔다는 얘기다. 이용훈 대법원장의 '듣기 민망한 표현'을 비판하는 쪽에서도 이 점은 인정한다.
여론이 이렇다면 발언 파문을 어렵게 볼 이유가 없다. '듣기 민망한 표현'에 대해 솔직담백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차제에 공판중심주의를 제대로 도입하면 된다. 그런데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 전사(前史)가 있다.
쉽게 끝나지 않을 법원과 검찰의 힘겨루기
사법제도개혁추진위는 공판중심주의를 도입하기로 하고 지난해 5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피고인이 검찰조서를 증거로 사용하는 데 동의하지 않으면 법정에서 증거로 쓸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검찰이 반발했고, 공판중심주의는 후퇴했다. 검찰 조서가 적법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 작성됐을 때 증거능력을 제한적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합의안이 새로 나왔다.
가까스로 합의안을 도출하긴 했지만 이것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국회 심의를 남겨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서 이용훈 대법원장의 발언 파문이 불거졌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는 진단은 그래서 나온다. 현상은 '듣기 민망한 표현'에 대한 감정대립이지만 실상은 공판중심주의를 둘러싼 기세싸움이다. 부적절한 표현으로 파장을 키워 공판중심주의의 당위를 설파할 수만 있다면 밑질 게 없다. 그러나 부적절한 표현을 약한 고리 삼아 친다면 공판중심주의의 예봉을 무디게 할 수 있다.
상황은 원점을 맴돌 것이고 기력은 갑자를 높여갈 것이다.
새삼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금태섭 검사다. <한겨레>에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을 10회 연재하려다가 첫 글을 마지막 글로 삼은 서울중앙지검 소속 검사다.
금태섭 검사는 첫 글에서 피의자가 되면 변호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끝내 게재되지 못한 두 번째 글에서는 조서에 도장을 찍지 말라고 했다.
설명은 이랬다. 수사기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피의자도 섣부른 행동을 하다가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일반인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피의자가 조서에 도장을 찍는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히려 자신에게 가장 불리한 증거를 만들어내는데 도움을 주게 될 뿐이다.
"검찰 조서에 도장을 찍지 말라"
대입해 보자. 금태섭 검사의 글을 이용훈 대법원장식으로 읽으면 어떻게 될까? 변호인이 입회하지 않은 검찰 조사실은 피의자에게 밀실일까 광장일까? 피의자에게 불리한 증거를 만들어내는데 도움을 주게 될 뿐인 검찰 조서를 판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금태섭 검사의 글은 공판중심주의를 둘러싼 법원과 검찰의 기세싸움을 진단하는 하나의 창이다.
금태섭 검사의 글이 뭐 그리 대수길래 창으로 삼느냐고는 말하지 말자. 김형태 변호사가 한 말이 있다. "금태섭 검사는 헌법을 읽어주었을 뿐"이라고 했다. 헌법 제12조, '모든 국민은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 한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대수롭지 않다. 너무나 보편타당해 헌법이 보장한 내용을 환기시켜 줬을 뿐이다. 그래서 창이 될 만하다. 보편타당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한 가지 사실을 전한다. 지난 20일 열린 제2기 대검찰청 감찰위원회 발족식에서 한 감찰위원이 금태섭 검사와 관련된 문건을 읽는 장면이 <한겨레> 앵글에 잡혔다. 이 문건엔 금태섭 검사의 기고문 내용과 관련 규정이 적혀 있었다.
금태섭 검사에 대한 감찰위원회 검토가 징계를 위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검찰은 금태섭 검사에게 기고 중단을 요구하면서 그 근거로 '검찰 공보관리지침'을 든 바 있다. 현직 검사가 외부 기고를 할 때는 반드시 상부에 보고를 한 뒤 허가를 받도록 한 게 '공보관리지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