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과목 선생님과 개별적으로 상담하지 마세요. 그건 나중에 컨퍼런스 데이(Parents conference Day)에 할 수 있으니까요. 오늘은 그냥 선생님으로부터 수업에 대한 말씀을 듣고 궁금한 점만 질문하는 날입니다."
교장선생님은 전체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개별 상담'을 금지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왜냐하면 한 과목당 교사와 학부모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10분으로 짧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개별 상담은 성적이 나온 뒤에 공식적으로 교사와 상담할 수 있는 '컨퍼런스 데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학부모들은 전체 모임이 끝난 뒤 입구에서 받은 안내문과 학교 평면도를 가지고 자녀의 시간표에 맞춰 교실로 이동했다. 미국은 우리와 달리 선생님은 교실에 있고 학생들이 자신의 학과목 교실로 이동한다.
이날 학교에서 정한 학부모들의 일정표는 다음과 같다.
7:00~7:10 전체 오리엔테이션(강당)
7:15~7:25 1교시 또는 1A 오리엔테이션
7:30~7:40 2교시 또는 2A 오리엔테이션
7:45~7:55 3교시 또는 3A 오리엔테이션
8:00~8:10 4교시 또는 4A 오리엔테이션
8:15~8:25 1B 오리엔테이션
8:30~8:40 2B 오리엔테이션
8:45~8:55 3B 오리엔테이션
9:00~9:10 4B 오리엔테이션
(수업은 94분이고 하루 수업은 4교시임)
학부모들은 학교 평면도를 봐가며 교실을 찾느라 분주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교실 앞에 나와있는 교사들이었다. 선생님들은 교실 앞에 서 있다가 학부모들에게 반갑게 악수를 건네고 교실로 안내했다.
교실에선 무슨 일이?
작은 아이의 첫 수업인 영어 교실에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입구에 서있던 선생님이 "찬미 엄마냐"고 물었다. 아마도 동양 애가 우리딸 뿐이어서 금방 알아봤을 테지만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아이 이름을 기억해줘서 기분이 좋았다.
1교시 수업에 온 학부모는 나 말고 한 명이 더 있었다. 딸의 수업이 '트랜지션스(transitions) 잉글리시'로 쉽게 말하면 ESL(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아이들이 배우는 영어)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어려운 외국인 학부모들로서는 학교에 오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영어 교사인 '미세스 테일러(Mrs. Taylor)'는 학부모가 작년엔 한 명도 안 왔는데 올해는 두 명이나 왔다고 좋아했다. 나 아닌 다른 엄마는 히스패닉이었는데 함께 온 아이가 선생님의 말을 스페인어로 통역해 주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수업계획서(syllabus)를 나눠주고 1년 동안 공부하게 될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집 전화번호와 학교전화 번호를 가르쳐주면서 상담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하라고 했다.
수업계획서에는 수업의 목적과 수업의 성공 비결, 성적 산출 근거와 교실에서의 규칙, 필요한 자료 등이 적혀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교실에서의 규칙이었다.
우리는 모두 어른이거나 거의 어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이에 맞게 행동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해준다면 교실에서 지켜야 할 규칙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규칙은 수업을 해 나가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개인적인 상담은 하지 말라고 교장선생님이 당부했지만 학부모 두 사람에게는 아주 긴 시간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몇 가지를 질문하고 있었는데 스피커에서 다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2교시 교실로 이동해 주십시오."
'세계사 우수반'(World History Honors) 교실로 이동했다. 이 교실에는 학생들 의자에 학부모들이 거의 다 앉았을 만큼 많은 학부모가 참석했다.
"시험과 퀴즈는 얼마나 자주 보나요?"
젊은 세계사 선생님인 '미스터 모이어스(Mr. Moyers)는 수업계획서를 나눠주면서 자신의 홈페이지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집에서 놀고있는 아이들에게 '숙제 없니?'라고 종종 물으시죠? 아마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놀고 싶어서요. 그런데 아이들을 '절대로' 믿지 마세요. 제 홈페이지에 들어오시면 여러분이 직접 숙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여러 부모님께 절대 가르쳐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제 홈페이지 주소입니다."
좌중에 폭소가 터졌다. 선생님은 한 학기 동안의 수업 계획과 성적 산출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했다. 성적은 시험과 퀴즈, 숙제와 프로젝트 그리고 수업 중 과제가 포함된다고 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학부모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시험과 퀴즈는 얼마나 자주 보나요?"
"프로젝트는 뭘 해야 하나요? 마감은 언제죠?"
"숙제는 매일 있나요?"
어찌 보면 극성스럽다고 할 만큼 학부모들의 질문은 진지하고 구체적이었다. 아버지들의 예리한 질문도 쏟아졌다. 교사는 학부모들이 가장 관심있어하는 프로젝트 질문에 대해 작년 프로젝트의 샘플을 보여주면서 설명했다.
교육열이 뜨겁다는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의 수업 내용과 진도, 그리고 숙제와 시험 등에 대해 알고 있는 학부모가 몇이나 될까. 과정보다는 점수나 등수 등의 결과에만 관심이 많은 우리 학부모들이 아니던가.
이렇게 진행된 '백투스쿨 나이트'는 9시가 넘어서 끝이 났다. 열성적인 학부모들은 예정된 시간이 훨씬 지나서까지도 교실에 남아 교사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미국의 '백투스쿨 나이트'는 우리의 학부모총회와는 확실히 그 성격이 달랐다. 우선 학부모를 학교 교육의 중요한 한 '축'으로 보고 그들을 학교 안으로 적극 끌어들인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 현장과 교과 내용을 과감하게 공개하고 학부모와 더불어 학교 교육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학교 교육의 주체는 교사나 학생뿐만이 아니라 학부모도 당당한 주체라는 점을 강하게 인식시켜 준 '백투스쿨 나이트'였다.
우리의 학부모총회가 일부 적극적인 학부모들만 참여하여 '조직'하고 '구성'하는 다분히 형식적인 모임인데 비해 미국의 '백투스쿨 나이트'는 학교생활이나 학업, 학생의 성적 등에 대한 학부모들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실제적인 모임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학부모총회를 열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더 많은 학부모의 참여와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리고 '공교육 회복'이라는 중요한 현안에 대해서도 학부모들의 지혜를 모아 좋은 대안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복잡하게 얽힌 우리 교육 현실에서 이런 생각이 너무나 순진한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도 이런 식의 직접적인 학부모 참여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