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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간의 화합과 사랑을 상징하는 붉은 하트가 등장한 시드니 하버의 2006년 신년불꽃놀이.
ⓒ TWT
지구의 아침을 여는 오세아니아에서 가장 큰 나라 오스트레일리아. 호주의 새날 새아침은 화려한 불꽃놀이로 열린다. 특히 '송구영신 불꽃놀이'는 CNN이 10년 연속 선정한 세계 최고의 불꽃놀이다.

이 중에서도 2006년을 밝혀준 시드니의 불꽃은 여느 해보다 아름다웠다. 불꽃의 중심에 사랑을 상징하는 붉은 하트가 매달렸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환호했고, 오페라하우스 지붕과 하버브리지 중앙에 매달린 붉은 하트는 "사랑의 힘으로 화해하라"고 당부하는 듯 보였다.

2005년 12월에 발생한 시드니 인종폭동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마련한 하트였던 것. 그렇다면 호주는 2006년을 사랑하고 화해하면서 한 해를 보내고 있을까?

월드컵을 통한 인종화합은 잠깐

호주를 환호와 갈채로 들끓게 만들었던 독일월드컵은 또 어떤가? 32년만의 본선출전에 이어 당당히 16강의 반열에 오른 호주는 기대 이상의 성적과 함께 축구를 통한 인종간 화합을 보너스로 챙겼다.

월드컵 16강 진출을 놓고 크로아티아와 운명의 일전을 벌여야 할 호주가 선수들의 출신국가 문제로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월드컵 4강 청부사' 거스 히딩크 감독이 "나 호주팀 감독 맞아?"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였다.

저간의 사정은 이랬다. 호주팀에 크로아티아계가 7명이나 있고, 크로아티아 팀에도 호주 태생이 3명이었던 것. 이들 10명 모두 크로아티아계 이민 2세로 호주에서 태어났지만 양팀으로 갈려서 경기를 펼쳐야 했다. 결과는 2-2 무승부.

호주국가대표 축구팀 '사커루'에는 크로아티아계 7명 말고도 이탈리아·그리스·체코·세르비아·보스니아·파라과이 출신도 포함됐다. 마침내 사상 최초로 월드컵 16강에 오른 호주는 인종문제는커녕 '다민족다문화주의의 승리'라면서 목청껏 만세를 불렀다.

호주의 인종문제란 이렇듯 좋은 일과 나쁜 일에 확연하게 다른 변수로 작용한다. 메인 스트림(주류 그룹)에 유리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조금이라도 손해다 싶으면 '네 탓이오'가 조건반사적으로 나온다.

▲ 호주의 레바논계 소년이 반전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 윤여문
무슬림을 공격하라, 그러면 표를 얻을 것이다?

그런데 호주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인종문제는 십중팔구 정치집단에서 빌미를 제공하고 그 이득을 챙겨간다. 1백만명 안쪽에 불과한 무슬림을 공격하면 절대 다수(약 1600만명)의 기독교인이 내 편이 된다고 계산하는 '단세포 동물'에 가까운 정치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런 현상은 여야를 불문한다. 최근에 불거진 호주시민권 획득절차의 개정논의도 백인 주류집단의 표심을 노린 정치인들의 얄팍한 계산이 바탕에 깔려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동안 2년 이상 체류한 영주권자는 언제든지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었다. 미국과 달리 시민권 취득에 소극적인 호주의 사정을 감안하여 영주권자로 남아있는 이민자들이 시민권을 취득하도록 호주 당국은 대대적인 광고를 하고 각종 편의를 제공해왔다.

그런데 9월 17일 입법예고된 개정안을 보면, 호주 시민권을 취득하려면 4년 동안 기다려야 하고, 영어시험과 호주에 대한 지식을 묻는 시민권취득 테스트(formal citizenship test)를 거쳐야 한다. 18세 미만과 60세 이상은 제외.

입법예고안을 발표한 앤드류 롭 이민부 차관은 "시민권 취득 테스트는 주요 다민족국가들인 미국·영국·캐나다 등에서 이미 실시하고 있다, 시민권 취득을 위한 대기기간도 호주가 2년인데 반해 미국과 영국은 5년, 캐나다는 3년"이라고 밝혔다. 여론조사의 결과는 77% 찬성.

보수도 진보도 "호주 가치가 싫으면 무슬림이 떠나라"

최근(9월 9일)에 실시된 퀸즐랜드주 선거에서 노동당이 4연속 집권의 신화를 이룩했다. 현재 호주전역의 6개 주정부와 2개 특별구를 노동당이 100% 장악하고 있다. 다급해진 자유-국민 연립당은 선거철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어온 인종문제를 또 다시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 선봉에 존 하워드 총리가 있고, 그의 후계자인 피터 코스텔로 재무장관이 최근 한술 더 뜨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코스텔로는 "호주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무슬림은 시민권을 박탈해야 마땅하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한 것.

존 하워드 총리는 이 말을 확인이나 해주는 듯 "무슬림 그룹이 주류사회의 주변부에 머물기 싫으면 호주의 전통적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그게 싫으면 호주에 오지 마라"는 원론적인 발언을 했을 뿐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동안 온건한 이민정책을 견지해온 노동당 킴 비즐리 당수마저 "관광객을 포함한 모든 외국인들에게 호주 입국비자 발급시 호주 가치관을 수용하겠다는 서약을 첨부하게 하자"는 뜻밖의 제안을 발표하여 정치인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내보였다.

다만 녹색당의 봅 브라운 상원의원만 "최근 호주의 분위기가 괴기스러울 정도다, 그동안 성공적인 다문화정책을 뿌리내려온 호주에서 자꾸 민족 간의 분열을 획책하는 정책과 발언이 계속 이어진다면 호주의 국론만 분열될 뿐"이라고 여야 정치리더들을 강력하게 성토했다.

▲ 조지 펠 추기경이 미사를 집전한 세인트 메리 성당 앞에서 시위 중인 무슬림들.
ⓒ 윤여문
왕따당하는 호주의 무슬림들

얼마 전에 끝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기간에도 레바논 출신 이민자들은 2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해외에서 위기에 직면한 호주국민을 구출하기 위해서 항상 최선을 다하는 호주당국이 자신들을 방치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 유럽계만 호주국민이고 중동계는 호주국민이 아니냐는 볼멘소리였다.

최근에 발표된 호주인구는 2050만 명이다. 그중에 무슬림의 숫자는 30만명을 약간 상회한다. 호주 전체인구의 1.5% 수준. 무슬림이 대부분인 레바논 출신 이민자는 7만 명 남짓인데,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레바논이 고립됐을 때 확인해보니 약 4천 명 가량의 호주 시민권자가 레바논에 머물고 있었다.

주류언론들이 딴죽걸기를 시작했다. 왜 그렇게 많은 호주시민권자가 레바논에 장기간 거주하느냐는 것에서부터, 그들이 이중국적을 허용하는 호주의 법망을 교묘히 이용해서 호주와 레바논에서 단물만 빨아먹는 얌체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비판했다.

청취율이 높은 AM방송국의 '토크 백 쇼'도 청취자의 전화를 받는 형식으로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호주에서 지급하는 복지수당으로 자신의 출신국가에서 편안하게 지내다가 온 사람들에게 특혜를 베풀 수 없다"는 백인주류집단의 항의를 여과 없이 방송했다.

어디 그 뿐인가. 종교를 떠나서 인류의 화합을 도모해야할 교황 베네딕토 16세까지 무슬림의 신경을 건드리는 발언을 하자 호주의 무슬림들이 들끓었다. 설상가상으로 호주의 가톨릭 리더인 조지 펠 추기경이 회교권에서 큰 파문을 일으킨 교황의 '성전'발언을 두둔하면서 이슬람 비판 대열에 가세했다.

조지 펠 추기경은 교황의 발언을 옹호했을 뿐만 아니라 존 하워드 정부가 입법예고한 시민권 테스트 법안도 적극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여 무슬림 그룹의 원성을 크게 샀다. 펠 추기경은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더불어 극 보수적인 성향의 가톨릭 지도자로 알려졌다.

▲ 인종폭동이 일어났던 시드니의 크로눌라 비치를 순찰 중인 호주 경찰들.
ⓒ 윤여문
호주는 지금 몇 시인가?

이민전문가들은 미국과 호주의 이민정책을 다음과 같이 나눈다. 미국의 이민정책이 미국화를 전제로 하는 '용광로(melting pot) 시스템'이라면 호주의 이민문화정책은 그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샐러드 접시(salad bowl) 시스템'이라고 분석한다.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는 특히 황인종의 이민을 배척하고 백인사회의 동질성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정책으로 1901년 연방이 결성된 후 통일이민제한법에 의해 이민정책에 본격적으로 반영되어 오다가 1973년 공식 폐지됐다.

바로 그 통일이민제한법의 골자가 영어테스트였다. 유색인의 이민억제책의 구체적 방법으로서 이민을 희망하는 자에게 어학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백인에 대하여는 사실상 시험이 면제되었다. 또한 영어를 해독하는 동양인에 대하여는 잘 모르는 그리스어로 대신하는 등의 수단을 사용했다.

그런 연유로 최근에 불거진 영어테스트 법안 입법예고가 '백호주의 21세기 버전'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교통 및 정보통신의 발달로 이미 지구촌화된 현대국제사회에서 호주는 지금 몇 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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