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지난 27일(현지시간) "한미동맹 관계를 현대화하려는 한국의 국가안보전략은 이 지역에서 전략적 유연성을 추구하는 미국의 노력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힐 차관보는 이날 미 하원 국제관계위 한·미관계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전시작전권 환수, 주한미군 재배치 등 한미관계 현안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용산기지 이전 등 주한미군 재배치(GPR)나 작통권 환수 등이 전략적 유연성의 일환임을 확인한 것이다.
작통권, 그 속에 '전략적 유연성' 있었네
얼마 전 <오마이뉴스>는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의 관훈클럽 초청토론회 기사를 '거짓말은 크게, 진실은 얼렁뚱땅'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바 있다.
당시 반 장관은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은 9·11 이후 미국의 전세계적 군사작전을 재검토하면서 나온 것"이라며 "국민이 원하지 않는 분쟁지역에 한국군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대원칙 하에 전략적 유연성에 동의한 것이고, 전략적 유연성과 작통권은 관계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틀린 말이다.
하나는 전략적 유연성은 작통권과 상관이 있다. 이 점은 이번 작통권 환수 논쟁에서 미국 쪽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 그리고 한국 외교안보 담당자들의 확인을 통해 이미 분명한 사실로 드러났고, 힐 차관보의 청문회 증언도 같은 맥락이다.
두 번째는 '한국군'이 개입하지 않는다고 말한 부분이다. 이 점을 <오마이뉴스>는 분명하게 지적했다.
여기에 대해 9월 5일 외교부는 보도자료를 내고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설명해 왔으며, 이러한 설명은 일관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것이 참여정부의 '외교적 비극'이다.
물론 원문은 맞다. 그렇지만 정부는 단 한 번도 국민들에게 정확한 해석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1월 19일 양국 외교부장관간의 한·미 전략대화 직후에 나온 <조선일보>(1월 22일자)의 제목은 '주한미군 해외파병 원칙적 허용, 중국과 대결 땐 한국동의 받아야'였다. 이것이 시중의 진실이었다.
1월 23일 필자가 맨처음 <오마이뉴스> 기고문을 통해 영문해석상 '한국군'이 가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 미군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동북아분쟁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했다. 하지만 아무도 여기에 주목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정부는 '주한미군'이 동북아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전략적 유연성 합의는 특별히 문제가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반기문 장관이 '주한미군'이 아닌 '한국군'이 동북아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반기문 장관은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에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합의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일관된 발언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의 해석대로라면 일관성이 있는 것이고, 지금까지 정부나 모든 언론의 해석대로라면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정부는 지금까지 이처럼 언론과 국민의 100% 잘못된 이해를 방치하고 있었을까. 아니, 왜 알고서도 그대로 두었을까? 한 마디로 왜 국민을 속이고 있었을까?
왜 국민을 속였을까?
전략적 유연성 인정은 주한미군의 완벽한 자유를 보장하게 된다. 입출입의 자유가 주한미군에게는 부여되는 것이다. 더 이상 주한미군은 '한반도 방위군'이 아니다. '동북아기동군'이 되는 것이다. 주한미군의 성격은 '대북억지력'에서 '동북아 억지력'이 되는 것이다.
주한미군 주둔의 근거인 한미상호방위조약 역시 당연히 그 성격이 변화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반도 방위와 미 본토방위를 상호 목적으로 한다. 주한미군은 한반도방위 뿐만 아니라 동북아 등을 비롯한 '전세계적 방위'를 목적으로 주둔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한미군의 성격이나 기지 성격이나 협정 성격도 당연히 변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회 동의를 받아야 했다. 미군의 전면적 철수로 이어질 수 있는 계기를 국회의 동의가 아닌 한미간 전략적 대화로 만들고 만 것이다.
미국에게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백지수표를 쥐어준 것이다. 용산기지 이전비용 전액부담청구권, 환경오염치유비용 전액부담청구권, 미군주둔비용분담금 증액청구권 등 이 모두를 '자주'와 '민족자존'이란 포장으로 미국의 손에 들려주었다. 전략적 유연성 개념을 숨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국민에게 알린 필자와 이종헌 외무관은 느닷없이 '강경반미자주파'가 되고 말았다. 주한미군 전면적 철수 위험성을 강조한 사람이 어떻게 '강경반미자주파'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사실을 숨기고 싶었던 외교안보팀의 고충은 이해한다. 그래서 그토록 '발설자' 색출에 나서야 했다. 하지만 한나라당과 경향신문 그리고 한겨레신문의 사설을 제외한 전 언론의 '융단폭격'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미군 전면적 철수위험성을 강조했고, 주한미군의 성격변화를 강조했고, 국회의 주권을 강조했음에도 왜 그래야만 했을까. 지금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증세' 논쟁에 그토록 익숙한 보수언론과 한나라당은 왜 100억달러 이상을 퍼주게 되는 이 논쟁에는 끼어들려 하지 않았을까. 참여정부의 실책과 거짓말을 비판할 수 있는 '최고의 소재'인데도 왜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꼭 다물고 있는가.
주한미군을 언제라도 뺄 수 있는 근거를 참여정부가 만들어주고 말았는데도 왜 한나라당은 가만 있었을까. 그러다가 왜 전시작통권 논쟁에서만 이토록 호들갑을 떠는 걸까. 미군은 이미 동북아분쟁에 빠져나간 사이에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도대체 작통권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전략적 유연성은 진행 중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의문들이다.
다행히 '작통권 쓰나미'가 지나가면서 묻혔던 진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논쟁을 거듭하다보니 작통권 환수의 뿌리에는 전략적 유연성이 숨어있다는 것을 한나라당도 비로소 알게 됐다. 이 과정에서 망외의 소득도 있었다.
다음은 8월 30일 노무현 대통령의 KBS 특별회견 중 일부분이다.
"작년 6월에는 가서 작계5020의 문제라든지 전략적 유연성에 관한 문제라든지, 그밖에 아주 민감한 그 당시 문제, 요즘처럼 말하자면 '노무현이가 한미관계, 한미동맹 깨먹을 거다' 이렇게 난리를 치던 그 주제에 관해서 부시 대통령을 만나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와 버렸죠."
전략적 유연성문제에 대한 합의가 올 1월 전략대화가 아닌 작년 6월 한미정상회담에서 합의되었다는 중대한 역사적 발언이다.
다음은 9월 19일 정대철 전 의원의 <중앙일보> 인터뷰 중 부분이다.
"대선 직후 12월 21일께 러포트 사령관에게서 전화가 왔다. 부시 대통령이 24시간 내에 노 대통령(당선자)이나 나를 만나라고 했다는 것이다. 타워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당시 러포트 사령관은 '앞으로 주한미군이 달라진다. 지상군을 붙박이로 박아 놓지 않고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에 따라 유연하게 배치할 것이다'며 미군의 전략 변화를 상세히 설명했다.(…) 전작권(이양)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미국 내부에서) 저절로 나오게 된 것이다."
전략적 유연성에 따른 주한미군 재배치 계획이 2002년 12월께 이미 한국정부에 통고되었다는 역시 역사적 증언이다. 이런데도 참여정부는 주한미군기지 재배치가 전략적 유연성과 상관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올 1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이 아닌 전략대화의 형식으로 전략적 유연성 개념을 공식화시켰다.
이 때도 주한미군이 우리의 뜻에 반해 동북아분쟁에 개입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거짓말했다. 그리고는 이제 와서 '한국'이나 '한국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슬그머니 발뺌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언론은 주한미군이 대만사태에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
전략적 유연성 합의가 있고 난 2월 16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이 안건이 보고가 되었다. 보고는 보고 자체로 끝이었다. 아무도 질의하지 않았다(제258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회의록 제6호 참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어느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국회는 보고만 받고 끝났다.
필자는 2004년 11월 12일 대정부질문에서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6년 1월 이 문제를 '폭로(?)' 했다. 그리고 필자에게 '국익' 차원에서 용감하게 진실을 이야기한 이종헌 외무관과 필자는 하루아침에 '강경반미자주파'가 되었다.
덤으로 '친북'의 누명도 안았다. 이종헌 외무관은 징계와 대기발령이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도 현업에 종사하지 못하고 외교안보연구원에서 '현대판 귀양'을 살고 있다. 도대체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필자는 지난 8월 25일 유명한 외교통상부 제1차관에게 이 문제를 질의했다. 유 차관은 "작통권 환수나 전략적 유연성이나 GPR이나 신속배치개념은 포괄적으로 보면 다 연관되는 개념"이라고 답했다.
그나마 차근차근 진실이 확인되어 가고 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할까. 누가 감히 국익을 이야기하는지 참으로 답답한 나날들이다. 누가 감히 한반도 안보를 이야기하는가. 누가 감히 국민의 세금 부담을 운운하는가.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는 현재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략적 지형의 변화의 뿌리가 곧 전략적 유연성임을 확인했다. 이것이 참여정부 외교안보정책의 실상이자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