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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좋아하는 수많은 장삼이사들이 힘차게 출발하고 있습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수많은 장삼이사들이 힘차게 출발하고 있습니다. ⓒ 이승숙
지난 설날 낮에 우리 시집에 그 시동생이 명절 인사를 왔다. 그 시동생은 명절 때마다 외가인 우리 집을 찾아와서 인사를 드린다. 큰 절을 올리고 좌정하는 생질을 보시며 우리 시아버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으셨다.

"야야, 조카 니는 와 그래 얼굴이 안 됐노? 어디 아푸나?"

얼굴 살이 쏙 빠지고 까맣게 그을린 그 시동생 얼굴은 어찌 보면 아픈 사람 같기도 했다.

"아입니더. 아무치도 않습니더."
"야야, 그런데 얼굴이 와 그런노? 어데 아푼 사람 같잖아."

내가 불쑥 물었다.

"아지뱀, 마라톤 하지요?"
"우에 알았십니꺼 형수님, 저 마라톤 하는 거요?"
"아, 딱 보니까 마라톤 하는 얼굴이네요 뭐."

남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알 수 있었다. 그 시동생의 얼굴과 몸은 마라톤을 하는 사람이라는 표시가 딱 나 있었다.

"아, 이 사람도 달리기 조금 하잖아."

옆에 앉아 있던 남편이 눈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이리 말하자 시동생은 눈이 둥그레져서 다시 나를 쳐다봤다.

"아이고 아지뱀요 저는 마 그양 쪼매 달리는 겁니더. 아지뱀처럼 전문적으로 마라톤하고 그러는 거 아입니더."

그런데 우리 시아버지는 암만 그래도 조카가 염려스러운가 보았다.

"야야 그거 뭐할라꼬 달리노? 사람 얼굴이 그기 뭐꼬. 그저 두둑하게 살 오르고 그래야 있어 보이고 보기 좋제. 조카 니 얼굴은 너무 말랐다. 살 좀 찌아야 되겠다."
"아이고 아버님요 그거는 옛날이야기고 요새는 살 찌마 보기 안 좋습니더. 이래야 합니더."
"야들이 무신 소리 하노? 살이 좀 있어야 보기 좋제 이래 마르마 없어 보이고 안 좋은기라. 니, 살 좀 찌아라."

우리 시아버지는 대기업 중견 간부인 시숙과 시동생 이름을 거론하시며 그렇게 몸이 두둑해야 보기에 좋다시며 살찌울 것을 다시 한번 종용했다. 내가 보기에는 얼굴이 허여멀겋고 두둑하게 살이 오른 그들보다 마라톤 열심히 해서 군살 하나 없는 이 시동생이 훨씬 더 보기 좋은데 옛날 사고방식을 가진 어른은 그리 말씀하셨다.

가벼운 마음으로 누구나 다 함께 할 수 있는 달리기, 몸도 마음도 건강해집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누구나 다 함께 할 수 있는 달리기, 몸도 마음도 건강해집니다. ⓒ 이승숙
42.195 킬로미터를 3시간 안에 주파하는 ‘서브 쓰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는 아닐 것이다. 자기 극복의 의지가 강하고 체력이 좋은 사람만이 이룩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을 해냈다면 그렇게 뿌듯하고 감격스럽지는 않았으리라.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더구나 자기 자신을 이겨낸 그 극기가 너무나도 대견하고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상 중에서 가장 큰 상은 내가 나한테 주는 상일 것이다. '서브 쓰리'를 달성한 시동생은 상 중에서 가장 큰 상을 받은 것이다. 조용하고 겸손하고 그리고 효성 지극한 우리 시고종 시동생의 낭보를 들으니 나도 덩달아서 흐뭇하고 기분이 좋았다.

한때 나는 의기소침하게 지낸 때가 있었다. 집 안에서 하염없이 바깥만 내다보곤 했다. 봄 햇살은 쨍하게 마당에 내리 꽂히는데 나는 집 밖으로 나갈 용기가 없었다. '한 발만 내밀면 돼. 거실 문을 열고 발 하나만 내밀면 돼'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거실 문을 열고 나오지를 않았다. 그 때 나는 나 자신을 믿지 않았고 당연히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발 하나만 내밀어도 이미 반은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다. 발만 내밀면 그 다음엔 자동으로 몸이 나아간다. 마음만 먹지 말고, 머리 속으로 궁리만 하지 말고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

턱이 두 개가 되도록 집 안에서만 뒹굴던 나는 어느 날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고 나중엔 달릴 수도 있었다. 조금씩 변모해가는 내 외양만큼이나 내 마음도 단단해져 갔다. 나는 나를 사랑했고 그리고 주변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10km 완주 메달을 목에 걸고 뿌듯한 마음으로 섰습니다.
10km 완주 메달을 목에 걸고 뿌듯한 마음으로 섰습니다. ⓒ 이승숙
10월 3일 개천절인 오늘, 강남구청에서 주최하는 '국제평화마라톤'이 있었다. 나는 잘 달리지는 못하지만 즐기면서 달릴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래서 참가 신청을 했고 오늘 달렸다.

나를 제치고 내 앞으로 쑥쑥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느긋하게 생각했다. '괜찮아. 조금 더디게 가도 끝까지 쉬지 않고 달리는 게 내 목표야. 인생길을 가는 데에도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즐기면서 갈 거야.'

달리면서 많은 것들을 봤다. 손목을 끈으로 서로 묶은 두 사람이 나란히 달리는 것도 봤다. 앞을 못 보는 장애인과 도우미가 나란히 달리는 거였다. 또 정신지체 장애인들을 열심히 독려하면서 끝까지 함께 달리는 도우미들도 봤다. 바람결에 나붓거리는 한강변의 갈대밭도 보았고 말없이 흘러가는 강물도 보았다.

나는 나와 약속한 대로 한 번도 쉬지 않고 끝까지 달렸다. 천천히 나아갔지만 끝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앞으로의 내 삶도 그리할 것이다. 옆도 보고 뒤도 보며 느긋하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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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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