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라이프 코드는 아마도 '웰빙'일 것이다. 웰빙을 상징하는 단어들로 명상과 건강을 들 수 있다. 차는 오랫동안 명상을 위한 좋은 도구로 알려져 왔다. 비단 웰빙이나 명상이 아니더라도 차는 어느덧 일상의 벗으로 자리를 굳혔다. 요즘 일상적으로 혹은 항상 일어나는 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다반사란 단어도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다는 불교용어에서 유래했다.
차를 즐기는 방법과 자세에는 차이가 있더라도 대부분 가정에는 하다못해 티백 녹차라도 볼 수 있으며, 여유나 취향에 따라서는 고가의 다기(茶器)에 우수한 품질의 차를 다량 구비해 놓은 사랑방도 가끔은 발견할 수 있다.
차의 역사는 상당히 길다. BC2737년에 차의 첫 역사로 기록될 만한 중국 전설도 전하고 있다. 과장된 듯하지만 차는 아주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해 온 문화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정도에는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차에 관해 무의식적으로도 떠오르는 중국이나 인도보다 한국이 먼저 차지한 분야가 있다. 다름 아닌 '차 음악'이다. 장르를 따지자면 한국 정악에 파생된 것이니, 현대 정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악도 그렇거니와 현대 정악도 그 특징은 여전히 느림에 있다. 차 역시도 바쁘다고 후루룩 마셔버리기에는 참 어울리지 않는 느린 여유의 공통점이 있으니 이 둘을 연결한 다악(茶樂)은 타당한 만남의 결과이다.
한국창작음악연구회(회장 김정수, 추계예술대 교수)는 지난 1998년부터 다악 음반을 내놓기 시작해서 지난해 서울아트마켓 선정 팸스 포이스 단체 중 유일하게 해외 에이전시 계약을 체결하였다. 세상에 크게 알려지진 않았으나, 이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흔히들 젊은이들의 크로스 오버 정도나 해외에 팔려나갈 상품으로 당연시하는데 반해 한국 대중조차 낯설어하는 다악이 해외 공연 기획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의미하는 바가 컸다.
현재 8집 <사군자>까지 내놓았으니 1998년부터 매해 한 장의 다악 음반을 세상에 내놓은 셈이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길은 고독한 일인데도, 혹자는 오만한 여유라고 폄하하는 일도 없지 않았으나, 창작음악연구회의 고집스런 행보가 마침내 한국음악의 세계진출로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창작음악연구회가 처음부터 다악의 콘셉트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김정수 회장을 비롯해 몇 명의 회원들은 차문화 전문 초일향의 회원이기도 하다. 어느 날 문득 초일향의 허재남 원장이 김정수 회장 등에게 차를 즐기는데 어울리는 음악이 있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이것은 음악가들에게 즉각적인 동감을 얻어 그 후로 다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작년 아트마켓 이후 다악의 해외 에이전시 바바라와 밀고 당기는 실랑이 끝에 복잡한 조건들에 합의한 양측은 올해 다시 열리는 서울아트마켓을 겨냥해 단독으로 쇼 케이스를 열었다. 12일 저녁 서울아트마켓 공식 일정을 마친 외국 공연 구매자들은 오후 6시 30분 가회동 궁중음식전문적 '궁연'에서 한국창작음악연구회가 마련한 저녁을 마치고 근처 쇼 케이스가 열리는 장소인 선재아트센터로 이동했다.
극장에 들어서자 경북대 임현락 교수의 설치미술이 눈앞에 한가득 들어오며 곧바로 펼쳐질 다악의 세계를 의미심장하게 예고하였다. 이날 쇼 케이스 공연에 소개된 다악은 모두 다섯 곡. 현대음악적 색채가 느껴지는 백병동 작곡의 녹향송에 맞춰 채원화 반야로 차도문화원장의 독수선차(혼자 수행하듯 차를 달여 마시는 것) 시범이 있었다.
차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채원화 원장은 유명하다. 속인이면서도 선인 같은 이미지를 강하게 풍기는 채 원장의 독수선차는 모든 동작의 시작과 끝이 몸의 단전 부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동작의 은유는 독수선차를 비롯해서 행다의 원리는 중심(中心, 重心)이자 정심(正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했다.
이후 거문고 독주에 김연구가 선무를 추는 김성경 작곡의 '달빛이 사냇물에 휘영청'. 박일훈 작곡의 차노래 '동다송', 이건용 작곡의 '잎-물-빛'에는 이미영의 다무(茶舞)가 거들었다. 마지막 곡은 박일훈 작곡의 '초일향'은 이 날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대금, 소금, 양금, 거문고가 연주되는 가운데, 다회가 진행되었다.
창작음악연구회 회원인 김성경 추계예대 교수가 팽주(다회를 이끌며 달인 차를 보시하는 사람)로 등장해서 연주가 아니라 차를 대접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다회이니 손님이 있을 터, 객의 자리에는 다화(茶畵)를 그릴 최금자 초일향 회원이 두 명의 외국인을 무대로 청하여 3인이 자리했다.
이후 차를 내고 마시는 조용하고 여유로운 다회의 모습이 이어졌고, 객석의 외국인들은 고아한 동양의 차 의식에 넋을 잃은 듯 바라보았다. 다회의 절정이라 할 다화를 그릴 때에는 작은 탄성조차 객석에서 흘러나왔다.
공연을 마친 후 반야로 회원들은 외국인과 쇼 케이스 참가자들을 위해 정성껏 차를 대접했다. 이미 공연을 통해 충분히 차에 대한 호기심이 높아져서인지 차를 입가에 가져가는 모습들에 누구나 할 것 없이 행복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행사를 마치고 만난 다악 에이젼시 바바라 스케일즈(Latitude 45)는 왜 다악을 선택했느냐는 질문에 "다악에는 서양에 없는 것들이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마음의 음악이고, 내면의 음악이며 선(仙)에 집중하는 신비한 음악이기 때문"이라면서 서양에 팔려면 그곳에 없는 것을 가져가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를 설명했다.
그렇다면 다악이 서양세계에 전반적으로 호응을 얻을 것으로 전망하느냐는 질문에는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다악에 빠져들고 오늘 객석의 또 다른 많은 외국인들이 그랬듯이 누군가는 좋아할 것이고, 그들을 찾아내는 것이 내 역할이다"고 말했다.
다악은 바바라 소속사인 Latitude 45 초청으로 11월 캐나다 CINAR 마켓 쇼 케이스에 참가하며 내년에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축제, 싱가폴 아시안마켓 쇼 케이스, 2007 스페인 공연을 예정하고 있다.
다악의 성과는 비단 해외 에이전시 계약이라는 외형적인 것뿐만 아니라 한국문화의 큰 전통의 하나인 예(禮)와 악(樂)을 하나로 연결했다는 점을 빠뜨릴 수 없다.
한국창작음악연구회가 다악을 통해 한국의 전통미학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월드뮤직의 한 장르로써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한국창작음악연구회가 낸 다악 음반 소개
다악(茶樂) 제1, 2집 - 차 한잔에 스민 색,향,미(1998년)
다악(茶樂) 제3집 - 그 푸른 날들의 찻잔. 초의(草衣)’(1999년)
다악(茶樂) 제4집 - 찻잔에 스미는 사계(四季)’(2000년)
다악(茶樂) 제5집 - 차 마시기 좋은때 풍정(風情)’(2001년)
다악(茶樂) 제6집 - 차로 이어지는 겨레.숨결’(2002년)
다악(茶樂) 제7집 - 차를 노래하는 박일훈의 동다송(東茶頌)’(2003년)
다악(茶樂) 제8집 -사군자(四君子)에 스민 다향(茶香)’(2004년)
다악(茶樂) 제9집 -하루 차 한잔, 일상의 명상(冥想)’(2006년)